장면 1
S국에서 탄저병에 걸린 사람 수십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A국은 S국이 탄저균 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탄저균이 유출되어 사망 사고가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S국은 단지 탄저병에 걸린 소고기를 먹어서 사람들이 사망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A국은 S국을 국제협약 위반으로 유엔에 제소했다. 유엔의 조사 결과, S국은 탄저균 실험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장면 2
어느 날 A국으로부터 탄저균 샘플이 포함된 소포 하나가 K국으로 배달됐다. K국은 A국으로부터 탄저균 샘플을 배달받은 지 며칠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일반에 공개했다. K국의 여론이 심상치 않자, A국은 배달 실수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자신들은 어떠한 국제협약도 위반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K국 정부는 A국의 해명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첫번째 장면은 1979년 소련 스베르들롭스크 지역에서 발생한 탄저균 유출 사건이다. 당시 미국은 소련이 생화학무기에 대한 국제협약(생물무기금지협약·BWC)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며 유엔에 소련을 제소하였다. 두번째 장면은 2015년 4월 말 한국 오산에서 발생한 탄저균 오배송 사건이다. 미국은 오배송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수’라고 인정했고, 한국은 미국을 유엔에 제소하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 탄저균이 배송된 지 벌써 5개월이 지났다. 메르스의 여파로 탄저균은 이슈의 중심에 있어보지도 못하고 잊혀가고 있다. 그간 짬짬이 시민단체들이 탄저균 이슈를 수면 위로 띄워보려고 애를 썼으나, 가벼운 관심에 하늘로 날아간 것인지, 아니면 미국이라는 거대한 무게 때문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다시 탄저균 이슈를 꺼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탄저균의 위험은 현재진행형이고, 미래진행형이기 때문이다.
1979년 사건에서 미국이 소련을 제소한 논거를 그대로 이번 사건에 덧입혀보자. 미국은 세균무기의 개발, 생산, 비축, 보유를 금지한 생물무기금지협약 제1조를 근거로 소련을 유엔 안보리에 제소하였다. 미국 주장의 근거는, 생물무기금지협약상 탄저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국제협약에 위반되는 것이며, 소련이 가지고 있는 탄저균의 양은 방어적인 목적과 평화적인 목적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떠한가? 먼저 미국은 탄저균을 보유한 사실이 없다고는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연구소와 다른 나라에 탄저균 샘플을 배송한 사실 자체는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탄저균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협약을 위반한 것이며, 보유를 넘어 탄저균을 다른 나라로 ‘배송’한 것은 소련의 경우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다.
미국은 이렇게 항변할 것이다. 탄저균을 ‘보유’한 것은 맞지만, 생물무기금지협약 제1조 제1항에 따라 질병 예방, 보호 또는 평화적인 목적으로 정당화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선 그런 목적에 맞는 탄저균의 형태와 양인지 조사해보면 될 것이다. 미국도 소련의 당시 해명에 대해 ‘해명을 인정받으려면 국제사회의 조사를 받으라’고 한 것이 아닌가. 미국의 요청대로 각국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조사단이 소련 현지에 파견되어 조사를 벌였고, 덕분에 국제사회는 소련의 세균전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36년 전 자신들이 소련에 요구한 것처럼, 정정당당하게 국제사회의 조사를 받으면 모든 의혹이 해소될 일이다. 미국은 이번 탄저균 오배송과 관련한 자체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현재까지, 지난 10년 이상 동안, 미국 국내 및 국외의 86개 시설에 탄저균 샘플을 보내왔다’고 한 바 있다. 양이 얼마인지는 밝히지 않은 채 단순히 횟수만 언급했다. 미국의 탄저균 보유량을 알아야만 생물무기금지협약상 예외적 보유에 해당하는지 알 수 있다. 참고로, 미국은 1979년 사고 당시 소련이 약 10㎏의 탄저균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평화적인 목적으로 합리화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보유량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이다. 미국은 소련에서 일어난 일을 가지고도 열심히 국제사회 일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한국은 어떤가. 자국 영토 안에 세균무기가 들어왔고 그 세균이 활성화 상태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은 고사하고 국민을 보호하는 주권국가로서의 의무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백승주 국방부 차관은 새정치민주연합의 탄저균 대책회의에서 ‘완전한 살균화 처리를 통해 안전 확보가 가능하다는 미국의 판단을 믿었다’고 말했다. 국민의 안전이 걸린 문제를 단순히 미국의 양심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피고인의 반성과 뉘우침은 실체적 진실을 가린 뒤 양형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고려되는 것이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로서 대우받고 싶다면, 1979년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2015년 지금 한국도 행동해야 한다.
방서은 민변 국제연대위 소속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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