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하는 디자인’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는 퍼트리샤 무어는 26살이 되던 1979년 ‘미래를 향한 놀라운 여행’을 감행하기로 결심한다. 미국 뉴욕의 한 기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할 때의 경험이 계기가 됐다.
어느 날 회의에서 퍼트리샤는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힘이 약한 노인들도 쉽게 열고 닫을 수 있는 냉장고 손잡이를 만드는 건 어떤가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디자인을 하지 않아”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라고?’ 그리고 감행한 일이 노인으로 살아가기였다. 3년 정도 80대 여자로 분장하고 미국, 캐나다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며 노인으로 사는 게 어떤 일인지를 생생하게 경험한 뒤 <변장: 실제 이야기>라는 책을 펴냈고, 이 책은 노인학은 물론 디자인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얼마 전 대구문화재단과의 업무협약 체결, 문화답사를 위해 재단 임직원들과 대구를 방문하였는데, 일정 중에 대구 중구 ‘근대로(路)의 골목 여행’이 있었다. 문화답사 출발점에서 배려의 마음이 담긴 건축 디자인과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동산 선교사 집 중의 하나인 스위저 선교사 집이었다. 마사 스위저라는 의료선교사가 살았다는 이 집은 1910년 대구의 몽마르트로 불리는 청라 언덕에 지어졌는데, 동서양이 혼합된 퓨전 가옥이었다. 동행한 문화관광해설사가 “한국 문화를 배려해서 한식 기와를 올려 지었다”고 설명했다.
서양 석조건축 양식인 외관과 벽체에 한국식 서까래와 기와를 얹은 박공 지붕. 어색하다거나 충돌하는 느낌이 아닌 ‘고즈넉하다’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 배려의 마음이 스며 있었다니…. 감동은 이처럼 디테일 속에 숨어 있었다. 스위저의 집은 1736년에 축조된 대구읍성 철거 당시 그 성돌을 가져와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았다고 한다. 건축적 요소 하나하나가 나의 마음을 붙잡았다.
‘근대로(路)의 골목 여행’을 마치고 대구문화재단과 업무협약을 체결한 뒤 저녁식사 장소로 가기 위해 단체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버스가 길을 잘못 들어 좁은 방천시장을 가로질러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시장길 양옆에는 각종 물건들이 즐비하였다. 이를 어쩌나! 저 길을 지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차가 800여m를 빠져나갈 때까지 꾸짖듯이 큰소리로 말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대신 몸집 큰 버스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진열된 물건들을 치워주고, 차를 빼주고, 현수막을 치워주고, 진열대를 비켜주기를 반복하는 방천시장 사람들. 대구 문화의 힘, 내공의 깊이, 배려의 마음 씀씀이가 일상 속 근대 풍경에 아름다운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원천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 여행을 통해 ‘배려’라는 관점이 내 인생에 스며들어 왔다. 누군가의 마음을 붙들려거든, 나도 모르게 발길이 머무는 곳을 만들려거든 먼저, 내가 사는 광주를 방문한 이에게 무엇을 배려할 것인지, 배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언지를 생각해보는 계기였다.
이유진 광주문화재단 정책연구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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