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기자님. 고은산입니다. 지면(11월25일치 ‘한겨레 프리즘’)을 통해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선배님의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제게 직접 보내주시지 않고 굳이 지면을 통해 보내신 건 그 편지의 수신인이 비단 저뿐만은 아닐 거라 생각해 저 역시 이렇게 지면을 통해 답신드리고자 합니다. 한 번도 뵙지도 못했고, 아직 의료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저를 후배로 대해주셨기에 저 역시 글에서 선배님이라 지칭하겠습니다.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의 생과 사를 다루는 의사들은 에볼라 발생 지역에서, 전쟁터에서, 최근의 메르스 사태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것이 의료인의 임무였기 때문입니다. 의료인들은 단순히 치료의 의무를 다한 것뿐 아니라, 말씀하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의 경우처럼 자신의 지식과 전문성을 사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저 역시 학교를 다니며 저는 감히 하지 못할 것 같은 희생과 헌신을 보여주시는 선생님, 교수님들을 많이 봐왔고 제 대자보 역시 선배 의료인들의 봉사와 헌신을 언급했습니다.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의료의 역사는 한낱 학생인 저로서는 감히 평가할 수 없는 고귀한 것이며 역사 속에 남을 위업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배님. 저는 의사 개인의 헌신과 봉사에 대해 말하는 것을 경계하려 합니다. 개인이 헌신적이고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들이 속한 집단이 그러하지 않다면 그건 역사가 아니라 미담일 뿐입니다. 헌신적인 수많은 의사 개인의 희생은 “그러한 의사들도 있었다”는 말로 기록될 수도 있겠지만 의사들을 대표한다는 대한의사협회(의협)가 나서지 않는다면 “의사들이 그러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저도 선배님도 알고 있는 것처럼 의료인의 정신을 구현해나가는 개인은 많습니다만 그들을 대표한다는 의협은 어째서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도 대응도 없는 것입니까. 왜 그 양심이 집단이 되어서는 발휘되지 못하고 있습니까. 저는 대자보에서 의사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대해 말했습니다. 집단의 침묵 앞에서 의사 개개인의 미담은 공허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선배님께서도 그걸 알고 계시기에 스스로의 편지에서 “어쩌다 보니 변명 같은 글”이라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시절 저항하는 목소리도 있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구호활동을 하는 의료인과 환자에 대한 국가의 폭력을 비판하고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의사들이 나서야 한다는 제 메시지와 행동은 ‘특별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제 대자보에 대한 반응은 저에 대한 칭찬이나 ‘의사들이 다 그렇진 않다’는 말이 아니라, 비무장의 구호활동에 공적 폭력을 자행한 국가와 이에 침묵하고 있는 의협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분노와 문제의식이 미담으로 흐려져 의료인 보편의 역사가 되지 못한다면 저는 도리어 자괴감이 들 것입니다.
선배님. 저는 걱정하시는 것처럼 의협이 나서지 않았다고 희망을 잃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다가오는 투쟁의 역사 앞에서’라는 문구처럼 저는 분노하고 소리치는 만큼이나 행동하고 싸우는 걸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의대협 임시총회 안건 상정을 위한 서명이 첫날에만 100명을 훌쩍 넘겼고 행동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부디 의대생을 대표하는 의대협이 움직이기를,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의사들을 대표하는 의협이 올바른 방향의 문제의식과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고은산 연세대 원주의과대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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