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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왜냐면] 복면의 정치 / 김민웅

등록 2015-12-02 18:44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 법을 따른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가 한 말이다. 법의 본질은 자유를 지켜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로마가 공화정이 무너지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원수정 체제가 된 뒤, 로마법의 권위자로 명성을 누린 율리아누스는 이렇게 외친다. “원수의 의지는 법의 효력을 갖는다.” 이는 훗날 법으로 민주주의를 소멸시킨 파시즘의 논리로 작동하게 된다.

로마의 공화정은 귀족들의 기득권을 방어하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였으나 1인 권력자의 의지가 법의 기본이 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원전 5세기께에 이미 전제왕정체제를 타도하고 내세운 정치적 자유의 원칙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은 원로원 정치의 한계를 넘어, 민중의 권리를 수호하는 호민관 제도를 이루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정치적 자유와 호민관 제도는 권력을 독점하려는 집권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박멸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로마사가 조지 베이커는 토지분배와 세제개혁을 주도했던 그라쿠스 형제들을 암살한 자들이 도리어 역사에서 패배했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쟁투의 과정에서 “법이란 시민의 자유를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일깨우면서 성장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의 헌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위기 앞에서 국가의 비상조처는 헌법적 정당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비상조처는 민주주의 헌법체제를 말살하려는 도전에 대한 대응이었다. 바이마르 헌법 48조는 공공의 안전과 질서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할 때 국가가 취할 수 있는 최고 권력자의 권한에 대해 규정하고 있었다. 파시스트 세력은 이 법조항의 개념을 변용해 바이마르 헌법 전체를 폐기하고 전제정치를 합법화했지만, 애초 전제는 민주주의 헌법체제를 말살하려는 세력에 대한 비상조처였다. 유신체제는 비상조처로 민주주의를 파괴한 생생한 역사적 실례다. 파시즘의 손아귀에서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수단이 거꾸로 민주주의를 폐기처분하는 데 쓰이고 만 것이었다.

파시즘 연구의 대가 프란츠 노이만은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비상조처의 권한을 누가 가져야 할지를 묻는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공공의 안전과 질서인가 하는 문제다. 민주시민의 기본권인 시위와 집회의 자유가 부인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약속한 시민의 안전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수많은 사람들의 미래를 결정짓는 정책에 대한 집단적 표현의 자유와 기회가 도리어 범죄화되는 사태는, 통제와 억압이 아닌 자유를 통해 성취되는 민주사회의 질서를 공격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주장하는 권리가 원천 봉쇄되는 곳에서 사람들은 권력에 대한 비상조처를 갈망하게 된다.

시위 참여 국민들을 테러조직과 비교하면서 복면시위에 대한 응징을 밝힌 대통령과, 법 제정 이전이라도 복면시위를 처벌하겠다며 죄형법정주의를 어기고 있는 경찰청장의 발언은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보장해야 할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격파 대상으로 삼고 있다. 최고 권력자의 의지를 법의 효력으로 받들어 모시려는 세력과, 자유롭기 위해 법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충돌을 우리는 보고 있다. 왜 모였는지, 왜 다시 모이려고 하는지 그 이유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권력은, 압제정치 아래 시민들의 권리를 각성시킨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주인공이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 복면 뒤에는 무엇으로도 무너지게 할 수 없는 신념이 존재한다.” 지금 누가 민주헌정의 안전과 질서를 위협하고 있을까? 비상한 조처의 권한은 누가 가져야 하는 것일까?

김민웅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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