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이사장 조돈문, 소장 이남신)가 주최한 ‘2015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 당선작입니다.
주차도우미의 감정노동 -만들어진 진상고객
황금별
“죽고 싶다.”
안내용 마이크는 반응이 한 박자 느렸으므로, 그 말이 사거리에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나서야 나는 내가 말한 것을 깨달았다. 약 10미터 바깥의 발레파킹 직원들이 컨테이너 박스에서 뛰쳐나와 주차도우미 부스 쪽을 내다보았다. 나는 마이크를 끄고 심호흡을 한 뒤, 바로 백화점 영업시간 멘트를 시작했다. 발레파킹 직원들은 잠시 서 있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주 잠깐 사이의 일이었다. 어느 1월의 밤, 주차도우미로 일하던 때였다. 직원들은 모른 채 넘어가주었고, 나는 다행히 질책을 면했다.
그 날 퇴근길에 내 노동의 대가인 140만 원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140만 원 중 30만 원이 육체노동에 대한 값이고, 나머지는 눈물 값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울었다.
유리 부스 안에 선 여자, 주차도우미
어디까지가 감정노동에 대한 값일까? 물론 딱 떨어지게 구분할 수 없는 부분이다. 주차도우미의 주 업무는 항상 사람을 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차도우미는 지정된 장소에서 친절한 인사와 동시에 주차 비용, 주차 공간, 운영 시간, 시설 내 행사, 시설 내부 지리 등에 대해 안내하고 고객의 요청 시 개개인에게 필요한 응대를 한다. 차량동선 조정, 입차 제한, 발권 등 지정된 장소에 따라 업무내용은 조금씩 바뀐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공통 업무는 입차 차량을 향하여 ‘미소를 가득 담은 인사’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사’는 일상적인 생활 내에서의 인사와는 다르다. ‘인사’는 기계처럼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45도 각도로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입으로는 ‘솔’톤으로 안내멘트를 하고, 허리를 펴면서 화려하고 눈에 띄는 손동작으로 차량 입차 방향을 안내해야 한다.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미소’다. 차 안에서 보아도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끔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입꼬리를 눈에 띄게 올려야 제대로 ‘인사’를 한 것이다. ‘인사’는 고객에게 친절해지기 위한 첫 번째 과정이다.
고객의 입장에서는 ‘인사’의 어디가 고객을 위한 것인지 의문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직원의 입장으로 현장에 투입되면 주차도우미는 배운 것 이상으로 활짝 웃게 된다. 사람들은 유니폼 입은 사람을 보면 ‘도대체 왜 주차하는데 1-2시간 이상 걸리는 것인지’에 대해 항의하기 때문이다. 물론 주차도우미는 그 이유를 모른다. 이유를 알아도, 할 말은 없다. 주차도우미로 일하게 된 사람은 그 때야 비로소 주차도우미의 일에 대하여, 그리고 주차도우미를 고용한 사람에 대하여 이해하게 된다. 고객은 심기가 불편한 상태이고, 누군가는 그 앞에서 서서 ‘이 주차장은 당신의 불편을 알고 있고, 신경 쓰고 있다’라는 의미로 친절한 미소를 던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불가능합니다’는 불가능하다
자, 이제 상황 파악이 된 신입 도우미가 가장 쉬운 근무지 중 하나인 지하 주차장 3층에 서게 되었다. 때는 일요일 정오, 코앞에는 차들이 좁은 간격으로 줄을 서 있다. 줄이 길어 출구로 가는 것도 어렵다. 사실상 갇혀있는 셈이다. 그 안에서는 다양한 사연들이 만들어진다.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부모, 화장실이 급한데 운전석에서 나올 수 없는 운전자, 몇 십만 원짜리 뮤지컬 공연을 예매했지만 주차 때문에 입장 시간을 한참 놓친 사람, 물건을 납품하러 왔다가 줄을 잘못 서서 전화기를 부여잡고 쩔쩔 매고 있는 기사까지. 이 상황에 주차도우미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친절하게 웃으며, 대기 시간이 40분에서 1시간가량 남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친절한 말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선팅된 창문 너머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공허한 친절로 도우미도 고객도 지쳐갈 때쯤 고객은 무리한, 그러나 고객 입장에서는 정당한 요구를 하게 된다. 위험하더라도 자투리 공간(그곳이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 앞일지라도)에 차를 세우고 싶다, 차키를 두고 갈 테니 알아서 해라, 필요한 물건이 있으니 가져와라 등이다. 난처한 요구에 SOS를 치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지만, 전방 50미터 이내에 유니폼 입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라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상식적인 답은 다음과 비슷할 것이다. ‘입구에 차량을 세우는 건 안 됩니다.’, ‘제가 임의로 근무지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차도우미로서 대답한다면, 위의 대답은 틀린 답이다. 주차도우미가 할 수 없는 말이 세 가지 있다. 그건 바로 ‘안 됩니다.’,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이다. 모두 다 이렇게 하느냐고? 주차 서비스 업체는 그다지 많지 않은데, 그중 유명한 업체 두 곳이 이런 교육을 하고 있다. 나를 교육했던 주임은 안 된다는 말 대신, ‘어렵습니다’라는 말을 쓰라고 알려주었다. 실제로 안 된다는 말을 어렵다는 말로 대신하면 어떨까. 고객에게 다급한 일이 없다면 그저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절실한 사람들은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라고 되묻게 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안 된다’라는 말은 해선 안 된다.
안내에는 분명한 의미 전달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안 된다’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는 이유가 뭘까. 단순하게도 고객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러한 제재는 주차도우미(여성)에게 한정된다. 수신호(남성)나 유도(혼성/바지착용) 근무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유도나 수신호는 되지만 주차도우미에게 불가한 것이 있다. 차 안에 있는 고객을 내려다보는 것은 금지사항이다. 무릎을 굽혀서 차 안의 고객과 눈높이를 맞추거나 그보다 낮은 위치에서 올려다봐야 한다. 왜 유도?수신호 근무자는 되고 주차도우미는 안 되는 것일까? 주차도우미를 고용한 사람은 정말 주차도우미에게 안내를 시키고 싶은 걸까?
가서 사과하는 것이 너의 일
근무 교대 이동 중이었다. 주차도우미가 배치되지 않은 근무지 앞을 지나고 있는데, 고객과 수신호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연인즉, 우수고객 스티커가 붙은 고객을 수신호가 알아보지 못하고 일반 차량 주차 대기 줄에 서라고 수신호를 준 것이다. 그러나 앞도 뒤도 차량으로 꽉 막혀 대기 줄을 옮길 수 없는 상황. 운전자는 화가 나서 수신호에게 언성을 높이고 있었고, 수신호도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인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남자주임이 무전기를 들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발걸음 속도를 빨리 해서 지나가던 나에게 주임은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사정을 설명하고는 “네가 가서 사과해”라고 말했다. “제가요?”라고 되물었더니, “남자손님이니까 가서 사과 좀 해. 너 여자잖아. 도우미가 낫지 수신호보다”라는 것이다. 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지만 손님에게 가서 눈높이를 낮추고 죄송한 표정으로 “우수고객이신데 저희가 못 알아봤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남자 손님은 몇 마디 불평을 하다가 유리창을 올렸다. 나는 닫힌 창문 너머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나서야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사건 속의 남자주임은 책임이 없더라도, 영문을 모르더라도 사과하는 것이 주차도우미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위의 사례 뿐 아니라, ‘인사’를 가르치는 방식에서부터 그러한 생각은 지배적이다. 고객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해, 주차도우미는 화내도 되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그 목적으로 주차도우미를 세워두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보고 있다, 보고만 있겠다
그렇다. 고객들은 주차가 늦어지면 당당하게 욕설과 폭언을 늘어놓는다. 자신의 발언으로 어떠한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것을 안다. 어떤 감정 노동이든 흔하게 겪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주차도우미는 그 상황에 자기방어다운 방어를 할 수 있을까? 도우미가 문제 고객을 발견했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문제 차량 근처에 가지 않는 것이다. 운전자가 차를 놓고 이동하기는 쉽지 않으니, 다른 차량을 안내하는 척 한다든지 해서 그 차를 피하는 것이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욕을 하거나 이리 오라고 소리를 질러도 말이다.
주차도우미를 묶어두는 것은 따로 있으니, 바로 머리 위의 감시카메라다. 감시카메라 설치의 주목적은 주차장 내부 확인이다. 주차장 전체를 모니터하고 필요한 근무지에는 실시간으로 지시를 내린다. 하지만 그 목적만은 아니다. 주차 시설 관리자들이 주차요원들의 서비스를 지켜보고 있다. 제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인사를 성실하게 하고 있는지 등을 본다. 업무태도를 꼼꼼하게 체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모니터 하면서도 문제 상황에서는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차량을 버리고 도우미 앞에 와서 언성을 높이는 고객이 있어도, 그렇게 10분 이상 경과해도 관리자는 오지 않는다.
이런 일도 있었다. 차량 입?출차를 컨트롤해야 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차를 막고 서게 된다. 간혹 주차도우미에게 ‘급정거 장난’을 하는 고객들이 있다. 속도를 잠깐 올렸다가 주차도우미 앞에서 급정거하는 것이다. 물론 있을 수 있는 실수다. 하지만 도저히 실수라고 말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어느 날, 두 개의 차선이 겹치는 지점에 서 있었는데 도보로 이동 중인 손님들이 내 쪽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그 중에는 우연히 그 앞을 지나는 대리도 있었는데, 갑자기 화난 표정으로 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바로 무릎 뒤에 차가 있는 것을 알았다. 차 안의 운전자는 무표정하게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우수고객 스티커를 보았다. 급하게 한쪽으로 비켜서자 차는 붕, 소리를 내며 시설 밖으로 나갔다.
대리는 나를 불러 혼내기 시작했다. 왜 거슬리지 않게 피하지 못했느냐는 것이었다.
“저 사람들, 너 하나 쳐도 문제없이 살 사람들이야. 다치면 너만 손해야.”
‘사람 하나 쳐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을 하는 대리도 마음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고객 탓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왕이니까’라는 태도는 나의 상사가 나를 진상고객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라는 기대뿐 아니라, 주차장에서 일하면서 갖고 있던 내 마음 속의 방어기제, ‘나는 근무자일 뿐이다, 나는 그들과 평등하다’라는 생각까지 무너뜨렸다. 이 시스템 안에서 그들은 왕이고, 나는 하녀다. 말을 탄 왕이 하녀 하나쯤 쳐도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라는 질문이 나만의 질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임, 대리, 과장, 소장할 것 없이 문제 상황을 알고 있었다. 특히 여성 상사들은 주차도우미 경력이 있는 사람이 대다수다. 다시 말해, 그들도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피해담의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주차 서비스 업체는 거의 다 아웃소싱이다. 1년 혹은 2년 단위로 서비스를 평가 받고 계약을 연장한다. ‘왜 똑바로 웃지 않느냐’, ‘손동작을 부지런히 하지 않느냐’ 하는 관리 감독은 재계약을 의식한 관리감독이다. 아무리 주차도우미가 “저 고객이 나에게 성희롱 발언을 했어요”라고 말해도 고객이 백화점에 컴플레인 한 번 걸면 재계약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론 백화점은 고객의 고견을 신경 쓸 뿐, 노동자의 사소한 상황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라는 질문에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일을 접고 나간다. 그러나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로 ‘어린’, ‘학력미달’, ‘가난’ 등의 키워드로 표현되는 사람들이다. 수능을 마치고 바로 돈을 벌기 위해 나온 친구가 있었다. 휴게실에서 수능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가 우리에게 옷가지를 집어던졌다. 스물두세 살쯤 되는 언니였다. 그녀는 “난 수능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사람이야, 내 앞에서 수능 이야기 하지 마”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그 휴게실에서 쉬고 있던 사람 중 대학교에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주차장에서 만난 사람 중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친구가 있다. 열여덟 살 여자아이였는데 궂은 아르바이트 경험을 흥미진진하게 늘어놓곤 하던 친구였다. 아쉽게도 나와 좋은 사이는 아니었는데, 갈등이 격해졌을 때는 관리자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저 언니는 어차피 오래 안 해요. 저는 여기에서 오래 할 거에요.”
그 친구는 다른 문제를 일으켜 주차도우미 일을 못하게 되었지만, 같은 근무지에 다른 소속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친구의 말대로, 나는 그곳에서 오래 일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노’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친구는 이곳에 남을 수밖에 없는 사람과 떠날 수 있는 사람을 구분하고 있었다.
수능 이야기를 하면 소외감 느끼는 사람들, 어리기 때문에 편의점에도 채용되기 어려운 사람들, 다른 일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 그들은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해.”
주차장을 나오며
질 낮은 일거리라도 해야 하는 사람들과 재계약에 목메는 아웃소싱 업체, 친절을 평가하는 백화점 속에 ‘손님은 왕’이라는 프레임은 강화되고 감정노동의 강도는 인권이라는 말이 허망하리만큼 높아진다.
주차도우미는 나의 첫 아르바이트였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하면서 그만 두었다. 그 뒤로 거의 1년 간은 악몽을 꿨다. 차가 나를 들이받는 꿈, 주차장 안에서 출구를 찾는 꿈, 사람들이 나를 쫓는 꿈…. 주변사람들에게는 “다시는 그 지옥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다시 돌아가면 나는 차라리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다녔다. 바로 다음 해에 나는 지옥으로 돌아갔다. 등록금과 생활비, 책값이 필요했고, 짧은 시간 안에 돈을 벌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두 번째 근무는 겨울부터 여름 직전까지 했다. 나를 채용한 업체는 달라졌지만 더 나은 점도, 더 나쁜 점도 없이 비슷했다. 백화점 주차장 갑질 모녀가 논란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나는 오히려 기뻤다. 언젠가 한 번은 조명되어야 할 일이었다. 아직도 주차장에는 감정노동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서 투쟁했다
여민희
2013년 7월6일 원직 복직과 단체협약 체결을 촉구하며 재능교육 본사를 마주보고 있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성당 종탑에 올라가 100일 넘게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재능교육 해고노동자 여민희(오른쪽)씨와 오수영(왼쪽)씨.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나는 행복하기 위해서 투쟁합니다. 현장에서 재능선생님으로, 노동조합 조합원으로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내가 행복할 때 동료들도 같이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반드시 노동조합 조합원으로 현장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발언을 하거나, 인터뷰를 할 때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을 정말 많이 했다. 그래서 가끔씩 생각한다. 노동조합원 재능선생님인 나는 지금 행복한가?
1999년 재능교육 정규직 사원 파업, 11월 재능교육 교사노동조합 설립, 12월 재능교육교사노동조합 조합원 33일 파업.
1998년 2월에 재능교육에 위탁계약직 학습지교사로 입사한 지 2년이 되어갈 무렵 내 인생이 바뀐 사건들이다.
그 당시에만 해도 경기남부권역에 꽤 이름을 날리던 재능선생님이었다. 개인실적, 팀실적이 상위권을 유지했고, 상품에 대한 교육도 잘했기 때문에 선배들이 말하던 정사원 발탁 0순위 대상자였다.
의리 지키려 포기한 정사원 자리
1차 파업이 끝나고 입사 후 줄곧 품어왔던 정사원 선발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함께 파업에 참가했던 선배들을 위해 포기했다. 그것이 의리라 생각했고 나는 다음을 기약했다. 선배들은 정사원이 되지 못했고 그 선발 과정 이후 회사에서는 꽤 오랜 기간 정사원 선발을 하지 않았다. 정규직 대신 사업부제(계약직) 팀장 제도를 운영하였고 선배들은 노동조합을 탈퇴하고 사업부제 팀장이 되었다. 탈퇴한 선배들을 보면서 의리를 지키겠다고 정사원 선발의 기회를 포기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몇 년이 지나고 정사원 선발 제도가 다시 만들어졌다. 함께 정사원의 꿈을 키워왔던 동료와 후배들이 하나둘씩 정사원이 되었다. 반면, 나는 노동조합의 반전임 활동을 하느라 수업을 3일 밖에 하지 못해 수입도 상당히 줄었고 정사원의 꿈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겉으로는 의리를 지키고 바른 일을 하고 있다며 당당한 척했지만 꿈을 접은 내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 그러다 내게 정사원 발탁의 제안이 들어왔다. 대신 노동조합을 탈퇴해야지만 정사원 지원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지원 자격에 탈퇴가 우선인 것이 말도 되지 않는다며 그건 못한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고민에 빠졌다. 노동조합 간부를 하던 사람이 탈퇴를 하고 정사원 지원을 한다는 것은 내게도, 노동조합에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생님으로 조합원의 자격은 가질 수 없지만 정사원이 되어 정사원노조에 가입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노동조합의 동지들이 말렸다. 정사원 지원을 하지 않고 그냥 교사로 현장에 남아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해는 하면서도 그 말이 무척 섭섭했고, 타인의 삶에는 배려도 없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한 동지가 이런 말을 했다.
“평생 함께할 사람들을 만난 거야”
“살면서 평생 함께할 사람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데 나는 지금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것 같아. 노동조합으로 함께하며 만난 사람들, 어딜 가도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는 없잖아. 물론 수입이 줄고 어려움도 있지만 사람이 가장 큰 재산이 아닐까? 너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어.”
이 말을 듣고 펑펑 울었다. 그리고 그 날, 평생 함께할 수 있으리라 믿는 사람들과 26세에 재능교육에 입사하면서부터 가져왔던 7여 년의 꿈을 맞바꾸었다.
노동조합의 반전임을 해제하고 현장으로 복귀를 했는데 수업을 할 회원을 더 줄 수 없다고 했다. 노동조합의 간부였기 때문에 관리자의 입장이 곤란하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어렵게 현장에 정착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3일이었던 수업이 5일로 늘어났고 시상으로 해외연수도 다녀왔다. 그렇게 현장조합원으로 익숙해질 2년의 시간이 지날 무렵, 노동조합에서 단체협약 합의안이 나왔다는 소리가 들렸다. 기쁜 마음으로 접한 합의안에는 재능교사들의 수수료가 삭감되는 제도가 있었다. 현장으로 복귀했던 예전의 간부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집행부에 항의를 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회사에서 시뮬레이션을 충분히 돌렸고 그것을 확인했으며 삭감되는 안이 아니라고 확언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수수료제도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조합원을 만나고 설득하러 다녔다. 그러나 단체협약 합의안은 전체 조합원의 찬반투표에서 아슬아슬하게 가결되었다. 얼마 후에 알게 되었지만, 투표 과정에서 부정이 있었고 그것이 결과에 반영되어 가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과 회사는 2007년 단체협약 조인식을 가졌다. 반대를 했던 조합원들은 새로운 수수료제도로 변경된 계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수수료제도가 시행되자, 첫 달부터 임금이 삭감된 현장 교사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부정투표와 삭감된 임금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한 재능지부의 집행부가 사퇴를 하고 단체협약 부결을 주도했던 조합원들이 비대위를 구성했다. 곧바로 단체협약의 재교섭을 요구했다. 뜻대로 개악된 수수료제도로 변경한 회사는 노동조합의 재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수수료 삭감에 반대하는 현장의 교사들이 서명을 하고 본사에 항의서한을 전하고 이렇게 몇 달이 지나도록 꿈쩍도 하지 않는 회사에 등을 돌리며 조합원들이 하나둘씩 현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수수료 삭감으로 생계가 곤란해져서 떠나는 조합원들을 붙잡을 수 없던 새 집행부는 결단을 내렸다.
구사대, 그리고 6년 투쟁
2007년 12월 21일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 집회를 마치고 그날부터 농성에 들어가기 위해 천막을 펼쳤다. 회사 건물에서 대기하던 구사대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그날 구사대의 폭력에 전치 2주의 부상을 당했고 회사에 6개월 일시계약정지 신청을 했다. 당시 3명의 전임조합원으로는 농성장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부장을 돕겠다고 먼저 이야기를 했고 노동조합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 10여년을 일했던 현장과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6개월이 지나면 당연히 복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현장으로 돌아가기까지 6년이 걸렸다. 그렇게 6년 재능투쟁이 시작되었고 가장 먼저 해고자가 되었다.
혜화동 농성장을 지키던 4명의 전임조합원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농성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 만큼 가장 많은 시간이 구사대의 폭력에 노출되었다. 어떤 날에는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른 채, 천막을 찢고 피켓을 훔쳐가는 수십 명의 구사대와 혼자 싸웠다.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걷는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구사대가 몰려나오는 듯싶어 온몸에 소름이 돋고 손발이 굳었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들고 나오는 구사대의 칼과 가위는 언제나 나를 겨냥해 있는 것 같았다. 정신 나간 채, 살려달라고 8차선 도로를 왔다갔다 뛰어다니기도 하고, 고가도로 난간에 올라앉아 깨진 플라스틱 조각으로 손목을 수차례 긋기도 했다. 내 감정과 상태는 추스를 여유도 없이 앉아서 지키고 누워서 잠을 자야 하는 농성장이었다. 이런 재능교육이 너무나 끔찍했고 혜화동은 말이 필요 없는 무간지옥이었다.
이러다 미치거나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생계를 이유로 댔지만 재능교육을 잊고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다른 직장을 구했지만, 떠나지도 못한 채 선전전을 하고 집회에 참석을 하고 일 때문에 지방을 다니면서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쪽잠을 잤다. 몸은 너무나 고되었지만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어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구사대 다음은 용역 깡패
그렇다고 평화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구사대가 빠지고 용역 깡패가 등장했다. 용역 깡패가 미세하게 뚫어놓은 두 개의 자동차 바퀴에 바람이 빠지면서 고속도로에서 차가 거의 주저앉았고 고속도로 경찰대가 출동했다. 속력을 내고 달린 상황이었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음담패설과 성희롱, 미행을 하고 생명을 위협하던 용역깡패들을 버티는 동안 재능교육에서 가압류 신청을 하여 거래중지 상태로 은행거래를 할 수 없게 되었고 가처분을 이유로 재능교육이 채무불이행자 등재 신청을 해서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집회를 하다가 공권력에 갇힌 상황에서 지부장을 먼저 빼내고 남아 구속을 당했고 구치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악마 같은 재능 자본 덕분에 난생 처음 겪어야했던 일들, 평생 겪지 않고도 지낼 수도 있었던 일들을 겪었던 곳이 혜화동 농성장이었다.
제정신으로는 버티기 어렵고 외로웠던 혜화동 재능교육본사 앞에서 조합원들은 더 이상 살 수 없어 2010년에 시청 앞 재능사옥 앞 환구단으로 농성장을 옮겼다. 그 무렵 재능자본은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현장에 남아있던 조합원들을 해고자를 만들었고 해고투쟁을 하는 조합원은 12명이 되었다. 재능지부는 조합재정과 지방의 해고 조합원들의 여건을 고려하여 생계를 병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가능한 조합원들이 농성장을 교대로 사수하였다. 구청직원들이 몰려와 천막을 철거하는 일이 있었지만, 혜화동에서처럼 구사대나 용역깡패가 몰려와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고, SNS 덕분에 농성장으로 지지방문 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서 예전처럼 외롭지는 않았다.
매일 저녁 환구단 앞에서 문화제를 했고 지부장과 학습지 사무처장이 단식을 하고, 연대단위 동지들이 릴레이 단식을 하고 재능교육 학습지불매운동을 하고, 재능교육은 가끔씩 협상안을 던졌다. 그러나 학습지노조의 위원장도 요구안에 넣을 수 없다 했던 12년차 해고조합원의 복직도 인정한 협상안을 사측이 제시했을 때도 ‘단체협약’이 빠진 합의안은 받을 수 없다고 조합원들은 결정했다.
농성하다 중환자실로
길거리 농성장에서 찬바람을 맞아가며 고열로 며칠을 앓다가 중환자실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긴 조합원, 아무 말 하지 못하고 홀로 병원에서 낭종을 떼어내고도 농성장으로 돌아온 조합원, 며칠 연락이 없어 수소문하다보면 병원도 가지 못한 채 집에 쓰러져 있던 조합원, 며칠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도 퇴원을 하면서 농성에 빠졌던 것이 미안해서 곧장 농성장으로 달려온 조합원…. 이런 조합원들이 되찾고자 했던 것이 노동조합이고, 단체협약이었다. 가끔 옆에서 지켜보던 연대동지들이 이쯤에서 정리하고 현장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고 이야기할 때도 단체협약 없이는 절대 안 된다고 했던 조합원들이었다. 물론 가정사로, 경제적 이유로 고통을 호소하면서 흔들리기도 하고, 포기하려고도 했고 수차례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함께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했고, 부담을 나누고 서로의 짐을 짊어지면서 한 발자국씩 헤쳐 나왔다.
그러던 중 학습지노조 내부에 폭언, 폭행 사건이 발생하였고 진상조사를 하자는 조합원들의 요구가 무시되면서 해고조합원들이 참석하던 지부 회의가 수차례 파행되었다. 오랜 농성에서 지친 심신의 문제, 감정의 문제를 우선 염려하여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연대동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심리치료를 받을 수 있는 방법도 찾으려 노력했다. 끝까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이 함께하는 투쟁 논의, 지부 회의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고, 모든 일정은 일방적으로 통보되었다.
오직 조합원들끼리 농성장 배치시간을 조절하고 혜화동 본사 앞 선전전을 진행하고, 현장 선전전을 하면서 우리가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대로는 노동조합도, 단체협약도 되찾기 전에 조합원들이 지쳐 포기할 것 같았다. 그렇게 두 달여가 지나던 중 ‘노동조합법상 노동자가 맞다’라는 행정법원의 판결은 우리 투쟁에 희망을 주었다. 다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조합원들이 모여 고민을 나누었다. “분신밖에 없지 않겠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뱉던 조합원의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재능투쟁을 함께 했던 연대동지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재능도 뭔가(전술)를 해야 하지 않겠어? 내부 문제? 그건 어디나 다 있어. 투쟁을 시작하면 조직은 추스를 수 있어. 그건 진리야. 재능은 지금 고강도 투쟁전술이 필요한 시기야. 된다니까. 일단 해봐!”
혜화동 성당 종탑으로…뜻밖의 갈등
6년의 투쟁에서 실행 직전에 실패를 하기도 했고, 몇 차례 고민을 하다 포기했던 고공투쟁을 하기로 조합원들이 결의하였다. 내부의 문제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지만 조합원들이 먼저 결의를 하면 모두 함께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장소를 결정하고 사람을 확정하고 그동안 조합원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전 임원들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어떻게 그런 결의를 할 수 있었는지, 애썼네. 그래, 그럼 우리 재능자본과 제대로 한 판 붙어보자.’ 이렇게 기다리던 답변 대신 돌아온 답변은 조합원들을 믿지 못해서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날 밤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포기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래도 하고 싶었다. 그동안 입버릇처럼 얘기해왔던 노동조합의 조합원인 재능선생님으로 일했던, 그 행복했던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 그동안 제대로 투쟁하지 못한 내 스스로의 죄책감을 씻고 싶었다. 주위에서 용기를 주었다. 투쟁에 막상 돌입하면 자본과의 싸움이 목적이니 함께 투쟁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믿었다. 진심은 통한다고 했으니까, 투쟁하겠다는 조합원들의 진심, 그 이상 무엇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013년 2월 6일 혜화동 성당 종탑 꼭대기에 올랐다. 무섭고 두려움이 컸지만 무엇보다 큰 희망을 가지고 올랐기 때문에 두려움을 누를 수 있었다. 회사를 마주보며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행복하기까지 했다. 종탑에 오른 첫 날 가졌던 벅찬 느낌은 뭐라 설명할 수 없었다.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달려 온 연대 동지들은 걱정을 하면서도 “잘했다”, “이제 재능투쟁 제대로 끝낼 수 있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음을 읽어준 동지들이 고마웠다. 다급해진 사측이 곧바로 교섭요청을 해 왔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결될 것이라 믿었던 내부문제가 난관에 봉착했다. 투쟁 중이었기에 쉬쉬하던 내부 문제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명망가는 투쟁의 주체들이 내부에서 이념분쟁으로 나뉘었기 때문에 좌파원칙주의자인 소수의 편을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고강도 투쟁을 결의한 조합원들은 권력에 눈먼 무원칙주의자가 되었다. 그 명망가의 발언은 SNS를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좌파와 우파’, ‘소수와 다수’, ‘재능자본과 결탁한 고공농성’, ‘집행부를 몰아내기 위한 고공농성’ 민주노조 운동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종파주의, 패권주의, 무원칙주의자로 다수가 소수를 배제하기 위해 고공이라는 전술을 선택하고 사측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그런 세력들로 평가되었다. 구사대의 폭력을 견딜 때보다 더 끔찍했다. 긴 세월의 재능투쟁에서 조합원들 개개인이 가졌던 어려움, 동지라 믿었기에 토로하고 극복했던 고민들, 부족하더라도 최대치까지 노력했던 조합원들의 활동은 폄하되었고 비난하기 위해 거짓까지 보태어 날개를 달았다. 애당초 조합원들의 진심 따위는 필요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투쟁 의지와 진심만 있으면 통할 거라 생각했던 조합원들은 미련하고 순진했다. 이런 상황을 사측은 판단하고 이용했다. 내부문제를 빌미로 교섭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종탑 농성 초기 사측의 태도와는 다르게 몇 개월 동안 교섭을 하지 못했다.
용기 누룽지로 삼시 세끼
종탑농성이 50일, 100일 하염없이 지나갔다. 생활은 적응이 되었지만,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용변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수치심은 나날이 더해 갔다. 초기에 끓는 물을 부어 먹을 수 있는 용기누룽지를 정말 많이 먹었다. 노동조합 재정을 전 집행부 임원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끼니걱정을 해야만 했다. 하루에 두 끼를 먹는데, 소화가 되지 않아서 죽을 사서 올려주면 둘이 나눠먹기도 하고, 반으로 나누어 하루 끼니를 해결했다. 비싼 죽값 때문에 조합원들에게 미안해서 용기누룽지를 사달라고 했다.
“난 누룽지가 좋아, 이게 제일 맛있어.”
대신 지지방문을 온 동지들이 먹고 싶은 것을 얘기하라고 하면 평상시 먹을 수 없었던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이야기하였다. 사정을 알게 된 한 단체에서 기금을 모금해서 식사를 챙겨주었고, 한 동지께서 매일 아침 집에서 밥을 챙겨다주기 전까지는 그렇게 끼니를 때웠다. 화장실 대체용으로 사용한 환자용 시트패드와 쓰레기봉투를 아끼기 위해서 배가 한참을 아플 때까지 참기도 했다. 아무리 싼 것을 고른다 해도 비용이 많이 들었고 패드를 왜 이렇게 빨리 쓰냐는 조합원의 지나가는 한마디가 못이 박혔다. 결국 나중에는 병이 생겼다.
많이 어렵고 힘든 시기였다. 무엇보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순간순간 모진 생각의 고비를 넘겼다. 발을 헛디뎌 아찔한 순간을 넘기고, 하늘을 쪼개는 천둥소리에 무섭고 놀라 눈물짓고, 번개에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고 강한 비바람 때문에 휘청거리다가 이렇게까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는데 살아서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강하게 마음을 먹고 몇 달 동안 가방 깊숙한 곳에 숨겨둔 밧줄을 버렸다. 그리고 ‘노동조합, 단체협약’만을 생각했다. 조합원들에게도 늘 “우리는 충분히 버틸 수 있으니, 신경 쓰지 말고 충분히 교섭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2013년 8월 26일 합의문 내용 중,
[ 1. 재능교육과 재능교육지부는 2008. 10. 31.자로 해지한 단체협약을 원상회복한다. … 3. 회사는 고 이지현과 해직교사 11명 전원( … )을 즉시 복귀시킨다.… ]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함께 행복해져야 했던 6년
정말 찾고 싶었고 듣고 싶었다. 100여 명의 조합원이 시작했던 투쟁이 6년이 지나는 동안 조합원은 해고자 11명만 남았다. 1999년 11월, 재능교육교사노동조합 시절부터 단체협약의 체결과정은 단 한 차례도 녹록했던 적이 없었다. 특수고용노동자의 최초의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유일한 단체협약을 지켜내는 것이 특수고용노동자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래도 단체협약이 있어서 우리 학습지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얼마나 당당해졌는지 현장이 아니면 절대 느낄 수도, 알 수도 없기에 현장 복귀의 판단은 어렵지 않았다.
노동조합을 시작하고, 투쟁을 할 때도, 떠나고 싶었을 때도, 다시 돌아올 것을 결심했을 때도 단 한 가지였다. 내가 행복해지려고 하는 일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과 함께 행복해지는 일을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행복해지기 위해 투쟁했던 지난 6년 동안 동지를 잃었고 동지를 얻었다. 그리고 연대를 다시 배웠고 투쟁을 다시 배웠다. 아직 씻기지 않은 상흔이 불거질 때면 조금 더 나 자신을 돌보고 아꼈더라면 조금 더 현명하게 투쟁했을 거란 아쉬움이 많이 든다. 그래도, 그래도 노동조합원 재능선생님인 지금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재능투쟁 거리농성 2076일, 종탑고공농성 202일은 2013년 8월 26일로 마무리 했지만 노동조합 16년, 우리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모두 행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한 놈은 뚫고 나온다
이영숙
이영숙씨가 지난 11월26일 서울 강남 ㅅ제약 본사 앞에서 ‘파견노동자’라고 쓰인 팻말을 들었다. 영숙씨는 ‘불법파견’으로 자신을 고용했다가 해고한 ㅅ제약을 상대로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류우종 한겨레21 기자 wjryu@hani.co.kr
8월25일 새벽 5시 45분. 안 감은 머리를 스윽스윽 어루만지며 부랴부랴 집을 나선다. 어느덧 가을이 온 듯 새벽공기는 제법 차다. 집 앞 한적한 길을 건너면 어김없이 빨간 관광버스 하나가 마주 달려온다. 우리 회사 버스지만 유유히 못 본 척 지나친다. 바로 집 앞에 서는 그 버스는 오로지 정규직을 위한 버스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분 남짓 걸어 나를 위한 통근버스를 타러 간다. 매일 아침, 마주 오는 빨간 버스를 지나치는 기분은 꽤나 초라하다. 특히 오늘은 더욱 그렇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저 내일부터 통근 안 타요. 앞으로 여기는 안 서셔도 되요. 그동안 감사했어요.”
통근버스에 오르자마자 기사님께 인사를 전했다. 무슨 일이냐며 놀라시는 아저씨의 말투에 놀람과 섭섭함이 베어 나온다. 오늘로써 여기에서 일한지 6개월하고도 3일이 되는 날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해고됐다.
전화 한통의 해고 통보…내 소속은 어디였지?
ㅅ제약회사에 다니던 나는 며칠 전 파견업체 담당자인 송 부장에게 해고를 통보받았다. 해고사유는 ‘ㅅ제약의 경영상 어려움.’ 해고통보는 전화 한통이면 충분했다. ‘더 열심히 하겠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왜 하필 나냐’고 이야기 한 번 해볼 기회조차 없다. 누구에게 이야기하는 게 맞는 건지도 전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난 이제껏 어디에 속해 일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대로는 억울했다. 구걸이라도, 하소연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맞다! 우리 회사는 한국노총 사업장이 아니던가. 해고통보를 받은 다음날 퇴근하고 한국노총에 전화를 걸었다. 혹시 도와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신분이 노출되는 것은 괜찮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회사를 다시 다녀야 하는데 괜히 불편할 것 같아 싫다고 했다. 그럼 한 번 알아보고 다시 알려주겠다고 했다. 한 가닥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1시에 점심을 먹고 나른해지는 몸을 바로세우며 일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주임이 다가와 1층 총무과를 가보라고 전했다. 해고와 관련해서 서류작성이 있는 건가 추측하며 총무과로 급히 내려갔다. 똑똑. 총무과를 두드리니 한 여직원이 나왔다. 그런데 나를 이사실로 안내하는 것이 아닌가. 어라.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침을 꼴깍 삼키고 이사실로 들어섰다. 안에는 3명의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2명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고, 1명은 6개월 전 내가 여기 입사할 때 봤던 송 부장이었다. 오늘로 두 번째 보는 얼굴이다. 송 부장은 한껏 긴장한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사가 나에게 앉으라며 손을 뻗고 나는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자리에 놓인 시원한 음료를 한 모금 크게 마셨다.
“상황이 이렇게 돼서 참 미안합니다. 우리가 IMF 때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참. 경기가 좋아지고 회사 사정이 나아지면 바로 부를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송 부장이 여기보다 좋은 조건에 일 알아봐주세요. 다음에 우리가 부르면 바로 일하실 수 있게 잘 모시고 계셔 주세요. 우리의 만남도 소중하듯이 헤어짐도 소중하지요.”
주저리주저리 이사의 말이 이어진다. 무슨 이야기인지 한참을 듣고 있었다. 나는 아무 대꾸 없이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그러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이사가 나에게 한마디 물었다.
“혹시 어디서 상담 받으셨어요?”
내 상담 내용을 저들은 어찌 알았을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반사적으로 “아니요.” 대답하고 어색한 침묵이 다시 흘렀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다시 일하던 곳으로 갔다.
분하고 화가 났다. 일이 당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얼른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어떻게 시간이 흐른 건지도 모르겠다. 퇴근하자마자 한국노총에 전화를 걸었다. 혹시 내 이야기를 회사에 한 것 아니냐고 쏘아 붙였다. 그러자 자신들이 알아보는 과정에서 유출이 된 것 같다며 미안하단다. 덧붙여 한국노총은 조합원을 위한 곳이라 파견직에게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전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게 뭔가.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더 또렷했다. 안산역 앞에서 파견직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했던 기억이 났다. 언제든 연락하라던 한 노무사의 얼굴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그때 받았던 볼펜이 어디 있을 것이다. 가방을 뒤져 밑바닥에 깔린 삼색 볼펜을 꺼내들었다. 볼펜에 적힌 전화번호를 꾹꾹 눌러 전화를 건다. 수화기 너머 조금은 어눌하지만 침착한 목소리가 들린다. 자초지종 억울한 사연을 말하자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나선다. 그래도 털어놓고 나니 기분은 한층 홀가분했다.
다음날 노무사를 직접 만났다. ㅅ제약회사가 불법파견을 쓰고 있다는 것과 내가 다시 복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다만, 해고 이후 불법파견 진정서를 넣고 직접 회사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진정서를 넣고 다시 복직이 된다고 쳐도 과연 그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회사에선 어떤 반응일까’, ‘파견업체 송부장이 날 해코지하진 않을까’ 수없이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 중 날 괴롭히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 다음 해고는 우리 언니들 차례’라는 것과 ‘어쩌면 언니들의 해고를 앞당기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의 충돌이다. 나로 인해 해고된다면 언니들이 얼마나 원망할까 두렵다. 그렇지만 엄연히 불법이 아닌가.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해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후회가 없지 않을까. 어떤 결과이든 지금의 파견직보다는 낫지 않을까. 불편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10년 불법파견직 언니들…나라도 꿈틀거려 보자
생각이 이어지다보니 나는 어쩌다 불법 파견직으로 오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이어졌다. 나를 얹혀살게 해준 제일 친한 친구가 계기였다. 조건 좋은 제약회사에서 파견직으로 일하다 정규직으로 가게 되면서 나도 희망을 품게 된 것이다. 지금 안산은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동재난구역’이라 불릴 만하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안산에서 제조업 취업은 파견직이 아니면 안 될 정도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안산에서 이름 한번 들어봤다거나 평판 괜찮은 회사들이라면 파견직이 아니고서는 발을 들일 방법이 없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건지 모르겠다. 나 하나 꿈틀거린다고 눈썹 하나 흔들릴 사람이 없다. 힘이 없는 내가 초라하고 화도 난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틀거려 보기로 마음먹는다. 1년, 3년, 5년, 무려 10년이 넘게 파견직으로 일한 언니들이 있다. 그 언니들이 해고를 당할 때 당하더라도 그들이 최소한의 예우를 갖출 수 있도록.
8월26일. 아침은 별다를 것 없이 찾아왔지만 그 어느 때보다 새로운 아침이다. 유난히 햇살도 좋다. 새벽, 언니들의 메시지들이 핸드폰을 많이도 울렸다. 나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난 괜찮다고, 언니들이 걱정이라는 안부만 전했다. 마음을 굳게 다지고 집을 나섰다.
안산노동지청은 인적 드문 곳에 자리하고 있어 꽤 한적하다. 괜히 긴장된다. 서류봉투 하나 내는 것뿐인데. 노무사님과 정문을 지나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니 창구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창구마다 업무에 열중하는 근로감독관들은 누구하나 아랑곳 하지 않는다. 맞은편에는 창구 하나가 따로 떨어져있고 젊은 공익 청년이 한 명 앉아있다. 서류를 제출하자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몇 분 후 프린터를 가리킨다. 프린터에서 갓 나온 따끈한 접수 서류 한 장을 들고 나왔다. 불법파견 진정은 간단히 끝이 났다.
파견회사 부장의 돈봉투를 뿌리치다
다음 날. 어색한 여유에 몸이 간지럽다. 집에만 있으면 없던 울적함도 찾아오기 마련. 집을 나서 화랑유원지로 향한다. 가는 길이 꽤나 길지만 혼자 생각하며 걷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듬성듬성 노란빛을 품은 풍성한 나무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마음을 토닥인다. 화랑유원지 중앙에는 인라인스케이트장이 있다. 그 곳에 지하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지하에는 도자기를 만드는 공방이 있다. 내 아지트다. 취미 삼아 만들려고 시작했으나 일을 마치면 피곤해서 미뤄두기 일쑤였다. 조물조물 흙을 만지다보면 시간이 금방 흐른다. 핸드폰에서 흐르는 한 인디가수의 노래 가사가 참 좋다. “우훗훗 아름답게 빛나라 청춘아/ 우훗훗 신나게 넘어져 본 그만큼/ 우훗훗 눈물일랑 거둬라 청춘아/ 우훗훗 그대로 그냥 폼이 난단다.”
해가 꼬물꼬물 기울어갈 때쯤 전화가 울렸다. 송 부장이다. 심장이 콩닥인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밀어 전화를 받자마자 녹음버튼을 눌렀다. 노무사님이 꼭 녹음을 해두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묻는다. 머쓱하게 웃기만 하니 화난 건 알겠지만 만나서 이야기를 하잔다. 만나서 할 말이 없다고 거절해도 제발 만나만 달라고 통사정이다. 그러면 노무사님과 함께 나가겠다고 딱 잘라 전달하고 전화를 끊었다. 휴우하는 한숨이 나도 모르게 쏟아져 나왔다.
8월31일. 한 커피숍에 미리 자리하고 있는 송 부장을 노무사님과 함께 만나러 갔다. 어색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커피만 홀짝였다. 송 부장이 먼저 입을 뗐다.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제가 더 좋은 자리 소개시켜 드릴게요. 어차피 채용해도 다시 다니기 힘드실 거 아니에요. 제가 너무 난처합니다.”
“아뇨. 다시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어요. 저는 부장님이랑 할 말이 없어요. ㅅ제약이랑 이야기 할게요. 할 말 없으시면 일어나겠습니다.”
거듭되는 살려달라는 말과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에 말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잠깐의 침묵 뒤 송 부장이 노무사에게 자리를 비켜줄 것을 요청했다. 잠시 담배를 태우겠다며 자리를 비켜주자 송 부장의 다이어리에서 하얀 봉투가 나온다.
“제발, 이거 받으세요. 제가 준비한 거예요.”
언니들은 드디어 계약직 전환…난 1인시위 중
다급하게 두 손을 뻗어 내저으며 이보다 더 강한 거절이 없을 정도로 손사래를 치며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후 두 차례 송 부장의 전화에 단호한 거절을 해야 했고, 며칠 뒤 송 부장은 잠수를 탔다. 안산노동지청에 조사를 받으러 참석해보니 ㅅ제약의 총무과장, 파견업체 사장이라는 사람이 나와 있었다. 껄끄럽지만 누구보다 당당하고 성실하게 조사를 받았다. 이틀에 걸친 긴 시간의 조사에 조금은 지쳤다.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친했던 회사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회사 언니들이 내가 저지른 일들을 이미 다 알았다고 했다. 언니들은 조용히 더 다닐 수 있었는데 시끄러워지고 불안해졌다며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럼에도 언니는 내 뜻을 이해하고 응원한다는 전화였다. 속상하지만 이해되고, 서운하지만 납득이 갔다.
조사 후 ㅅ제약은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다. 내가 노동부에 진정을 넣고 1달쯤 지났을 무렵이다. 회사 언니들 50여 명은 직접고용 1년 계약직으로 전환됐다. 그러자 언니들의 반응도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러다 정직원되는 거 아니냐, 상여금 더 받을 수 있게 되는 거 아니냐 등. 물론 나를 욕하는 사람들도 줄었다는 것.
어느덧 11월이다. 나 역시 직접고용 판결을 받고 ㅅ제약에서는 이력서를 제출하라고 통보했다. 이력서와 각종 서류들을 제출하고 두 번의 면접을 봤다. 헌데, 각종 이유를 대며 전에 일하던 곳으로는 다시 갈 수 없다며 진주영업소로 갈 것을 제안했다. 거절하자 내가 취업의 의사가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며 회사는 노동부에 보고했다. 그 보고를 받은 노동부는 회사가 직접고용의 의무를 다했다고 본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난 해고 이후와 같은 상태다. 다만, 한 가지 얻은 것은 내가 꿈틀거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회사 이사의 작별인사, 파견업체의 간곡한 부탁과 거절했던 돈 봉투, 회사 언니들의 계약직 전환들 모두. 내 꿈틀거림에 대한 대가다. 드라마 <송곳>의 대사가 잘 설명해준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부터 나온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안산노동지청과 ㅅ제약 본사에서 1인 시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