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시작된 지 8년 만에 삼성은 보상을, ‘반올림’은 농성을 시작했다. 이를 두고 여러 언론이 반올림의 변화를 촉구한다. “반올림, 자기 입장 고집하며 논의 가로막아”(조선), “보상에도 어깃장 놓는 반올림”(중앙), “8년째 반걸음도 못 나간 반올림”(동아), “반대 쳇바퀴 8년”(문화) 등등.
과연 그럴까. 반올림은 자기 입장만을 고집해왔고, 그래서 변해야 하는 것도 정말 반올림일까.
최근 상황만 짚어봐도 반올림의 입장은 크게 세번 변했다. 첫째는 작년 말, 삼성이 조정 절차 도입을 강행할 때였다. 당시 삼성은 조정위원회 구성까지 확정한 채 반올림의 참여를 종용했지만 반올림은 조정 절차 자체를 반대했다. 그때까지의 논의가 모두 원점으로 돌아갈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계속 반대하자니 피해 가족들의 고통이 길어질 것 같았다. 결국 조정 절차에 참여하기로 했다.
둘째는 올해 1월, 조정위원회에 반올림의 요구안을 제출할 때였다. 그 전까지 반올림은 ‘직업병 예방 대책’의 하나로 “반올림이 추천하는 전문가가 참여하는” 외부 감시기구의 설치를 주장했다. 그런데 반올림이 추천권을 고집하면 삼성도 비슷한 요구를 할 것이고, 결국 감시기구의 독립성이 훼손될 것 같았다. 그래서 조정 절차에 참여한 뒤 “반올림이 추천하는” 부분을 모두 뺐고, 조정권고안도 공익법인의 구성에 반올림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따라서 “공익법인에 반올림이 주요 보직을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서울경제) 따위의 기사들은 전부 거짓이다.)
셋째는 올해 7월, 조정권고안을 받아들일 때였다. 권고안에 따르면 직업병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삼성의 “기부”에 의한 “사회적 부조”다. 예방 대책의 핵심인 ‘옴부즈맨 제도’는 권한이 모호하다. 또한 반올림은 ‘화학물질 정보의 공개’를 요구했지만, 권고안은 “정보공개를 위한 규정의 제정”을 제안할 뿐이다. 하지만 반올림은 이를 모두 수용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배제 없는 투명하고 공정한 보상’이었기 때문이다.
자, 이러한 상황을 놓고 다시 묻자. 정말 변해야 하는 것은 반올림인가, 삼성인가.
삼성은 이 문제와 관련해 자신만이 항상 옳다는 독단과 외부 개입을 허용할 수 없다는 폐쇄성을 고수해왔다. 지금의 쟁점도 단순하다. 직업병 문제 해결의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삼성과 그럴 수 없다는 반올림의 싸움이다.
반도체 직업병 논란은 2007년 삼성에서 시작되어 2014년 에스케이(SK)하이닉스로 번졌다. 에스케이하이닉스도 처음에는 문제를 부인했지만 곧 태도를 바꿨고, 지난달 대책을 발표했다. 두 기업의 차이를 두고 어느 언론은 “(삼성전자와 달리) 시민단체의 반대나 간섭이 없었던 것도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줬다”(한국경제)고 했다. 하지만 에스케이하이닉스는 문제의 진단과 대책 마련을 독립적인 외부기구에 맡겼다. 시민단체의 간섭이 없었던 게 아니라 시민단체의 참여를 허용했다.
그사이 삼성은 어땠는가. 반도체·엘시디(LCD) 공장의 직업병 피해 제보가 220여명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그 공장의 안전보건 실태를 진단한 보고서를 은폐하고 있다. 최근에는 교섭 도중에 자체 보상 절차를 강행해 직접 보상 대상 심사와 보상액 산정까지 하고 있다. 독단의 극치다. 반올림의 노숙농성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래도 반올림이 지나친가?
한편 최근 <한겨레>는 김상조 교수의 발언을 인용하여 “반올림도 현실적 여건을 고려한 해결 방안을 깊이 고민해줬으면 한다”고 썼다. 앞에 나열한 세번의 변화가 그러한 고민의 결과들이다. 모두 치열하게 고민했고 무겁게 선택했다. 그럼에도 더 고민해야 할 “현실적 여건”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면 좋겠다. 길에서 농성하며 싸우는 우리도 정말 궁금하다.
임자운 변호사, ‘반올림’ 상임활동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