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52조를 고쳐야겠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을 무능하게 보이게 하고, 국회를 무력화하는 근본원인이 무엇인지 고민한 결과, 헌법 52조가 문제인 것 같다. “국회의원과 정부는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다.”
현대사회의 복잡성을 고려하여 전문성을 가진 행정부에도 법률제출권을 준 것이라는 명분인데, 제헌헌법 때부터 존재했단다. 우리나라가 미국식 대통령제를 본떠 오면서도, 무엇 때문인지 유독 이 조항만은 특수하게 넣어서 대한민국의 삼권분립에 위험요소를 심어놓았다.
행정부는 막대한 자금력으로 많은 공무원과 전문가를 고용하고,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수 있으므로 전문성과 구체성을 따진다면 의원 집단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 따라서 행정부와 그들의 법률안은 스마트해 보이고 의원들의 제출안은 왠지 허술해 보이고, 법률안의 종류도 행정부가 다 차지하고 남은 겉절이류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국민들에게 정치혐오를 조장하고 국회를 무력화하여 결국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국회를 모독하는 것은 사실 민주주의를 모독하는 것이다. 국회는 민주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은 각 지역의 국민들이 선출한 대표자들이며 그들이 합의하는 것이 ‘민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와대가 국회의원들이 무능하다 치부하고 ‘민생을 위해 잘 마련한 법안이니 거수기나 하라’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국회를 비난하는 것 같지만 결국 국민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무지한 국민들아, 이게 전문가들이 고안한 최고의 법안이니 정부에 협조나 하라’고. 무식한 국민이라도 설득해서 동의를 구하는 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현명한 철인이 모든 것을 컨트롤하겠다는 것은 곧 전체주의다.
헌법 52조의 삼권분립 훼손은 행정부가 항상 입법부보다 우위에 서게 하기 때문에, 행정부가 국회를 우습게 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미국의 경우, 행정부가 법안 제출을 하려면 자기 당 의원에게 대신 제출하도록 설득해야 하므로 의회를 존중하고 의회와 원만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만약 대통령이 국회를 공개적으로 모독하기라도 한다면 의원들이 단합하여 그 행정부는 임기 내내 법안 제출에 어려움을 겪다 좌초할지도 모를 일이다.
반면, 한국은 어떤가. 한국에서는 정부가 일단 법안을 제출한 후 소위 ‘민생’ 법안이니 당장 통과시키라고 의회를 압박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3일 새해 대국민담화에서 ‘국회 심판론’까지 거론하며, 국회의장의 법안 직권상정을 요구했다.
이런 제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명심하고 지켜나가야 할 가치는 ‘삼권분립’이다.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외국에 대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입법부, 사법부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지지만, 행정부의 수장으로서는 입법부, 사법부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이것이 삼권분립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들 셋 중에 누가 더 강한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갖느냐를 매긴다면 국회, 행정부, 사법부 차례다. 국회가 행정부보다 앞서는 이유는 국회 구성원은 전원이 국민의 직접투표로 선출된 사람인 데 반해, 행정부는 대통령 1인만 국민에 의해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향후에는 헌법을 고쳐,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가 민의를 합의하여 입법을 하면, 행정부는 집행을 하는 진정한 삼권분립을 이뤄야겠다. 그러니 대통령께서는, 현행 헌법 덕분에 국회보다 우위에 서 계시지만, 삼권분립의 가치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직권상정 같은 무서운 협박은 삼가시길 바란다. 국민을 섬기고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국회를 더 대우해주시길 바란다.
이상렬 서울 구로구 구로5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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