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인들은 향후 오랫동안 동·서독의 통일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등 주변 강대국들이 독일 통일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이런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1990년 전격적으로 통일을 이루어냈다. 미·영·프·소 모두 독일통일에 반대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1949년부터 20년 동안 서독을 통치한 기민련 정부는 동독에 대한 봉쇄정책을 펼침과 동시에 미국 등 서방국가와의 관계정상화에 진력했다. 이런 정책은 전후 서독의 경제 부흥 및 국제적 위상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969년 집권한 빌리 브란트의 사민당 정부는 동방정책을 통해 외교정책의 방향을 크게 바꾸었다. 브란트는 동독을 사실상 국가로 인정하면서, 동·서독 간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민족적 동질성이 유지되면 독일 통일의 절반은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서방세계와의 우호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도 소련 및 폴란드 등 동유럽 공산국가와의 관계증진에 적극 나섰다. 그는 독일의 통일은 유럽의 평화 속에서만 가능하며, 독일 통일은 유럽의 평화에 기여하는 방향에서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 평화 속의 독일’ 정책이었다.
야당과 보수언론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반대했으며 브란트를 실각시키려 했다. 또 동독은 동방정책이 동독체제의 보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 주저하다가 소련의 압력에 못 이겨 마지못해 관계 정상화에 임했다. 동독은 서독과의 교류를 통해 경제적으로 큰 이득을 취하면서도 브란트 총리 집무실에 간첩을 침투시켰다. 이 간첩사건으로 임기 2년을 남겨둔 브란트는 불명예 퇴진을 당했다. 야당과 보수언론은 동독에 배신당한 브란트와 동방정책 모두를 비아냥거렸다.
북한의 핵개발 및 인공위성 발사와, 이에 대응하는 우리 정부와 새누리당, 보수언론들의 대북 강경정책을 보면서 문득 1970년대 브란트와 동방정책의 시련이 상기된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독일과 우리를 단순 비교하면 안 된다. 브란트의 뒤를 이은 헬무트 슈미트 정부는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착실하게 계승했다. 특히 1982년 집권한 기민련의 헬무트 콜 정부는 야당 시절의 반대 입장과는 달리 슈미트 정부보다 더 적극적으로 동방정책을 계승했다. 1990년 독일 통일은 서독의 우월한 경제력과 브란트·콜 정부의 ‘유럽 평화 속의 독일’ 정책의 성과물이다. 독일 통일 후 동방정책의 주인공 브란트와 통일의 주역 콜 총리가 함께 통일의 영웅으로 칭송받은 이유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동북아의 평화 속에서만 가능하다. 미국·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중국·러시아 등과도 좋은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간단한 진실이 박근혜 정부에 의해 간과되고 더 나아가 부정되고 있다. 개성공단 폐쇄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는 남북관계는 물론이요, 우리와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를 크게 악화시킬 것이다. 미국·일본·남한 3각 동맹과 중국·러시아·북한 3각 동맹이라는 냉전시대의 유물이 복원될지 모른다. 중국과의 경제교류에서 큰 손실이 초래되고 동북아의 평화가 송두리째 위협받을 수 있다. 이런 어리석은 정치를 하는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세월호 사건에서 드러난 박근혜 정부의 무능이 군사·외교·경제영역으로 계속 확대되고 있어 큰 걱정이다.
최영태 전남대 역사학 교수
최영태 전남대 역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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