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존자원 없는 이 나라가 살아나가는 유일한 길은 외교다. 그런데 이 절체절명의 위급한 민족 존망 시점에 한국 외교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금 한반도는 브레이크 없는 고장난 자동차와 같다. 남북한 모두 브레이크가 없다.
정부는 한반도의 전면전의 위험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국민 혈세를 미국의 고고도미사일체계(THAAD, 사드)를 구매하는 데 쓰지 못해 애가 타는 것 같다. 북의 핵실험을 통일의 기회라고 확신하는 것 같다. 북의 핵실험을 내심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무력통일의 기회라고 여기는 극우론자의 강한 마법이 현재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정부 당국이 흡사 이 마법에 걸려 한-미 동맹을 강조하면서 민족의 생존 운명을 강대국에 맡겨 놓고 방치하는 것 같다.
통일보다 한민족의 생존과 정체성이 유지돼야 통일도 있는 것이다. 한반도 같은 좁은 지역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면 남북한 모두가 자멸한다는 것을 북한도 잘 안다. 그렇다면 북핵은 체제 생존을 위한 군사용이 아니고, 협상용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북한의 핵폐기와 평화협정을 병행 협상해, 행동 대 행동 이행원칙을 실행하면 길은 보인다. 바로 그 정답이 2005년 9·19 공동선언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선(先) 핵폐기를 고집해 9·19 공동선언은 실행되지 못했고, 한국도 그 공범자가 되었다. 현재 북핵 문제의 본질은 북핵 폐기와 동시에 북-미 적대관계 종결을 협상하면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고, 그 답은 모두 우리의 손안에 있다.
북한의 제4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유엔 안보리의 강한 제재를 빌미로 주변 강대국들은 한반도의 특수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한반도를 전쟁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사드를 팔아 큰돈을 챙기려는 미국 군산복합체 무기상, 중국의 패권주의적 흥정, 일본 군국주의의 탐욕이 한반도를 폭풍처럼 질주하고 있다. 한반도의 상황은 대한제국 말엽보다 더 위기인데, 그때는 목숨을 내놓고 나라의 불행을 막으려는 진정성 있는 애국자가 있었다. 그런데 현재 최고 결정권자의 주변에는 직언하는 이가 보이지 않고, 한국 외교는 중심을 잃은 것 같다. 필자도 북핵을 반대하지만, 그 접근 해법의 주체는 한국이어야 한다. 한국의 참여 없이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는 바람에 일제 식민지와 분단으로 이어졌던 지난 역사를 잊었는가.
4·13 총선 정국을 앞두고 지금 국정을 책임진 정부, 정부를 견제할 여야 국회, 사회 공기인 언론이 모두 통일대박론, 무력통일론의 마법에 빠져 정상이 아닌 것 같다. 대한민국은 헌법상 민주공화국인데, 편향된 민족관과 세계관을 가진 일부 극우론자의 마법에 지금 지나치게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박근혜 정부가 집권 초기부터 강변한 통일대박론의 실체가 전쟁통일론이 아니기를 희망한다.
우리 국민들은 현재 통일보다 평화를 원한다. 자유·평화·민주라는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의 3대 원칙이 철저히 지켜지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우리는 강력히 원한다.
남-북한 간의 모든 출구를 끊어버린 현재의 군사적 긴장은 한반도를 대한제국 말엽처럼 강대국의 전쟁터와 전리품으로 넘길 우려가 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정부 당국은 제발 5·24조치를 해제하고, 무조건 북한과 만나서 대화하고 교류·협력하기를 바란다.
국민들은 지금 무척 불안하다.
이장희 한국외대명예교수,평화통일시민연대상임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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