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인권 교육에서는 대개 ‘용어’에 대한 교육을 먼저 한다. 장애인의 반대말은 ‘일반인’,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이라든지, ‘장애우’라는 말은 잘못된 용어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장애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개 ‘조심스러움’과 ‘배려’의 뜻을 담아서 장애우라고 부르기에 이 말이 오히려 ‘차별과 편견’을 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당황하곤 한다.
최근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 자녀의 대학 부정입학 의혹이 제기됐다. 핵심적인 의혹 중 하나는 ‘나 의원의 딸이 면접 도중에 자신의 어머니의 신원을 밝혔다’는 것이다. 현재 나 의원과 해당 학과 학과장은 장애 학생에 대한 배려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배려’가 그 학생을 위한 길일까? 나는 오히려 그녀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배려는 제공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나 의원의 가족들은 자녀가 그런 실수로 입시에 실패한다면 굉장히 속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수가 그녀의 장애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실수는 아니다.
물론 우리는 장애인들에게 개개인의 장애에 맞는 지원을 해야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시각장애인에게는 각종 시험에서 더 많은 시간과 보조인을 제공해야 한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학생이 있다면, 휠체어를 타고도 출입할 수 있는 곳에서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열악한 교육 환경에 처하기 쉬운 장애인들을 위해서 장애인 특별전형 등의 제도를 통해 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이것은 장애인들의 ‘권리’이고, 사회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그러나 그들이 ‘동등하게’ 경쟁하게 하는 것 또한 장애인들의 권리이고, 사회의 의무이며 책임이다. 나 의원의 자녀가 실수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그것이 안타까운 실수라 해도 원칙에 맞게 처리하는 것이 오히려 그녀를 동등한 주체로 대하는 것이 아닐까? 장애를 갖고 있다고 해서, 마치 갓난아이처럼 배려받는 것이 그녀를 위하는 것일까? 심지어는 장애인 학생들 간의 경쟁이었는데도 말이다. 만약 이것이 나 의원의 주장대로 특혜가 아니었다면, 나 의원이 가장 먼저 분노해야 하는 것 아닐까? “왜 그녀를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느냐. 다른 경쟁자들과 같은 원칙을 적용해 불합격 처리하라”고. 그것이 그녀가 말하는 장애로 인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위해,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진정 딸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미국의 동시대 미술가인 인디언 출신의 제임스 루나는 자신의 작품 <인공품>에서 인디언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이분법적 인식에 저항하기 위해 스스로 작품이 되었다. 하나는 ‘미개하고 열등한 인디언들’이라는 차별적 인식,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고 한없이 순수한 인디언들’이라는 ‘차별적 인식’이다. 그는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직접 전시함으로써 미국 사회가 실재적인 인디언을 마주하게 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서 차별과 편견은 언제나 악마의 탈을 쓰고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차별과 편견은 매우 자주 ‘천사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장애인들과 동등한 주체로 진정 평등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다. 나 의원도 마찬가지다. 아마 자녀분 또한 자신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입학하게 배려하는 어머니와 사회보다는, 그 실수로 인해 실패하더라도 그 정정당당함을 응원해주는 어머니와 사회를 더 원할지도 모른다. 이건 순전히 한 명의 20대이자, 누군가의 자녀로서 내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말이다.
이준희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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