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가 ‘소리 없는 살인자’라는 오명을 얻게 된 것은 장시간에 걸쳐 조금씩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피해를 ‘안방의 세월호’라고 빗댄 것도 기업의 무리한 이윤추구,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 때문일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야간노동을 2급 발암물질로 규정했다지만, 대한민국의 고교생은 ‘경쟁’의 심리적 압박까지 더해진 상태에서 ‘야자’(야간자율학습)라고 하는 야간(학습)노동을 하고 있다. 이 역시 장시간에 걸쳐 학생들의 건강뿐 아니라 의식 성장에 매우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필자가 근무하는 인천지역 고교의 경우 ‘학습선택권조례’ 덕분에 강제로 야자나 보충수업을 하는 분위기가 많이 완화되었다. 하지만 자발적 복종이라고 해야 할까. 최근의 고교생들은 스스로가 원해서(!) 밤늦게까지, 새벽까지 학습에 시달리고 있다. ‘명문대’ 학벌을 취득하는 것이 인생의 행복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기성세대의 주입 속에서 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깊이 내재한 채 학교에 다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인 최장시간의 학습량, 그러나 학생들의 행복도는 최하위인 이 모순된 교육 현실에 대해 더 이상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면, 이는 마치 가습기 살균제의 폐해가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 작은 실천이 고교의 ‘야자 폐지’다. 건강과 정신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비판적 측면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현재와 같은 과도한 야간학습이 입시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수의 교사들은 알고 있다. 최근 입시는 이른바 ‘학생부종합전형’을 강조하고 있는 추세다. 이 전형은 동아리 활동 등 다양한 학창 시절의 활동을 중요시한다. 또 ‘높은’ 서열의 대학에 입학했다고 해서 안정적이고 행복한 생활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도 점점 확대되고 있다.
한편, ‘야자 폐지’에 대한 학부모, 학생, 교사의 공감과 단위학교 차원에서의 실행이 가능하려면 적정한 최저임금의 보장, 직업별 근무조건 개선 등 관련한 사회적 인프라 구축이 전제되어야 한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하루 8시간 정도의 일과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에게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최소한의 재화를 보장해준다고 해보자. 부모 등 기성세대들도 이렇게 자기의 아이들이 피말리는 생존 경쟁의 전초전이라고 할 입시교육에 내몰리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다.
교육 문제는 사회 시스템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다. 이번에 개원한 20대 국회가 시도교육감, 대학 교육 관계자, 교원단체, 시민사회단체, 노동계 등과 힘을 합쳐 학벌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도록 하는 법 또는 기초 생활이 가능한 합리적 액수의 최저임금제, 대학평준화 관련 법 등을 만들어 낸다면, 한국 사회가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입시 경쟁 교육에 대한 거대한 사회적 전환의 계기를 제도적으로 마련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학교에서 아이들이 밤늦게까지 남아서 ‘2급 발암물질’인 야간(학습)노동에 매일같이 시달리는 대신에 도서관을 이용한다든지 지역사회 주최의 프로그램에 참여한다든지 가족들과 포근한 저녁식사를 한다든지 하는 각종 다양한 문화체험활동이나 여가활동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많은 문제 제기가 있어왔지만 최근에야 전 국민의 공분을 샀다. 만시지탄의 아픔이다. 마찬가지다. ‘야자’도 단시일에는 그 심각성이 느껴지지 않을지 몰라도, 고교에서는 청소년들의 건강과 영혼이 매우 피폐해지는 제도로 오래전부터 굳어져왔다. 교육과 그 교육으로부터 시작된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를 개선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기득권과 관행에 짓눌려 모르쇠하기보다 이에 대한 개선 방안을 어떻게든 내놓을 때가 되었다.
이광국 전교조 인천지부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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