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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죄인이 돼버린 고리원전 온배수 피해 어민들 / 류제화

등록 2017-02-20 18:32수정 2017-02-20 19:01

류제화
법무법인 한강 변호사

“우리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보상받기가 힘이 듭니까?”

한 어민이 내게 말했다. 소금기에 전 주름살이 유난히 깊게 패어 보였다. 명색이 변호사인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원전 1호기가 가동을 시작한 이래 40여년이 흘렀다. 그사이 고리원전에는 원자로 6개가 증설되었고 작년 말 신고리원전 3호기가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고리원전이 위치한 기장군 앞바다를 생업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던 어민들은 원전에서 배출되는 온배수로 인해 상당한 어업 피해를 입었다. 고리원전은 발전설비 열을 식히기 위해 바닷물을 끌어들여 냉각수로 쓰고 데워진 온배수를 다시 바다로 배출해왔다.

어민들은 손 놓고 기다리지 않았다. 고리원전을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보상 협의에 수차례 나섰고, 마침내 한수원은 2008년 어민들과의 합의 아래 10억여원을 들여 어업피해 조사 용역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어민들은 그 결과만 나오면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한수원은 2012년 용역기관인 전남대 수산과학연구소가 제출한 최종보고서를 불합격시켰다. 그 적절성 여부는 현재 법원에서 다투어지고 있다. 어민들은 마냥 판결을 기다릴 수 없었다. 대부분이 이미 고령인 어민들에게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서둘러 사건을 들고 세종시에 있는 중앙토지수용위원회(중토위)로 갔다. 중토위는 공익사업의 시행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결정하는 국가기관이다. 그런데 믿었던 중토위마저 사건을 접수한 지 1년이 지나도록 본격적인 심리를 개시하지 않고 있다. 제대로 된 법률검토도 없이 담당 공무원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지금 당장 어업피해 조사 용역을 맡긴다고 해도 결과가 나오기까지 족히 2년은 걸릴 텐데 어민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라가 공익사업을 해야겠다며 피해를 입혔으면 즉각 사과하고 보상을 해줘도 시원찮을 판에 오히려 피해 입은 사람들이 나라에 굽신거리며 보상을 구걸하는 형국이라니. 헌법 제23조 제3항은 이러한 경우 국가가 국민에게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절차를 규정하기 위해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도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법과 괴리되어 있다. 현실 속의 국가는 국민에게 능력껏 보상금을 타가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런 식이라면 헌법과 법률은 국민의 재산에 대한 국가의 약탈을 정당화하는 날강도법일 뿐이다. 어민들 입장에서는 한수원이나 중토위나 모두 국가다. 믿는 국가에 발등 찍힌 국민은 더 이상 하소연할 곳이 없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라는 법언이 있다. 이미 4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려온 어민들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은 특혜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헌법과 법률에 따른, 그래서 지연되지 않은 정의를 바란다. 재산권을 침해당하고도 보상을 구걸해야 하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버린 슬픈 어민이 내게 묻는다. 나의 국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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