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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수많은 다니엘 블레이크들을 위해 / 최일영(가명)

등록 2017-03-27 18:30수정 2017-03-27 18:52

최일영(가명)
시민

필자는 월 30만원도 벌지 못하는 극빈자다. 심각한 퇴행성 디스크를 비롯한 여러 질병을 앓고 있어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 그동안 아르바이트로 연명해왔지만 지금은 건강상의 한계에 봉착해 일을 쉬고 집에서 요양 중이다. 집에는 필자 말고도 60대의 어머니와 70살의 아버지가 계신다. 두 분 다 별다른 벌이가 없다.

최악의 상황, 말 그대로 ‘굶어 죽는’ 일을 모면하기 위해 필자는 국가의 기초생활보장제도에 의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좌절만을 경험해야 했다. 첫째는 부양의무제 때문이었다. 근년에 왕래가 없는 형과 형수의 소득이 기준액을 초과한다는 이유로 필자의 부모님은 수급자로 선정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둘째는 근로능력평가제 때문이었다. 형제인 관계로 부양의무제 적용을 받지 않는 필자가 1인 가구로 독립하여 수급권을 얻고자 했지만, 이를 위해서는 근로능력평가를 받아 ‘근로무능력자’ 판정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필자는 말 그대로 몸이 아파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퇴행성 디스크가 심각하게 진행되어 서서 움직이는 일을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기서부터 대부분의 육체노동 일자리에서 배제된다. 디스크 외의 또 다른 질병 때문에 앉아서 일하는 것도 힘들다. 물론 겉으로는 멀쩡한 30대 남성이다. 문제는 복지 당국의 판단 기준이 ‘겉으로 멀쩡한 30대 남성’에서 멈춘다는 점이다. 그 이상을 넘어서 실제로 해당 신청인의 근로능력을 정밀하게 평가하려는 제도적 장치도, 당국의 의지도 없음을 당사자의 입장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실질적으로 장애인이나 고령의 중질병자가 아닌 이상 근로무능력 평가를 받기가 불가능한 것이 현행 제도다.

필자도 국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스스로의 처지가 한심스럽다. 이왕이면 돈을 버는 납세자로서 어려운 이들을 돕는 쪽에 서고 싶다. 하지만 여러 사정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었고, 죽을 수는 없기에 최후의 수단으로 수치심을 무릅쓰고 도움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일인 소득 3만달러를 바라보는 세계 10위 경제대국인 대한민국은, 이미 수백억대의 부자인 최순실 일가를 위해 수천억원의 예산은 편성할 수 있지만 나와 같은 이들에게는 단 한푼의 도움도 주지 않는 나라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필자는 이번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찍을 생각이다. 하지만 필자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공약을 제시하는 후보는 오히려 보수정당 소속인 경우를 계속 접하고 있어 혼란스럽다. 정운찬 전 총리는 소득 하위 40%에 대한 기본소득 공약을, 유승민 의원과 남경필 지사는 부양의무제 폐지 공약을 내놓았다. 반면 민주당 후보의 경우, 문재인 전 대표와 안희정 지사는 부양의무제 폐지에 대해 미온적이거나 묵묵부답임을 기사를 통해 확인했고, 이재명 시장의 단계별 기본소득 공약은 필자와 같은 이들에게는 오히려 예기치 못한 피해를 줄 수도 있어 걱정스럽다.

영국의 복지 현실을 꼬집은 영화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진보 언론과 정치권에서 화제가 되었다. 심장병을 앓고 있음에도 질병수당을 받지 못한 다니엘 블레이크, 별다른 큰 질병이 없는 30대와 60대 초반의 여성이라는 이유로 근로무능력자 판정을 받지 못한 세 모녀의 사례는 필자의 경우와 동일하다. 비극적 불행과 감동적 영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모호한 감상주의와 정서적 카타르시스에 맴도는 가운데, 모든 문제의 핵심인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굶어 죽기 직전의 빈민과 환자들을 위해서 단 한푼도 쓸 수 없다는 국가와 복지 당국의 철통같은 방어로 세간의 관심에서 차단되고 있다. 그리하여 필자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수십만 다니엘 블레이크는 예정된 종말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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