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참상을 알린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 1974년 나는 대학원을 나와 안병무 박사가 독일 교회의 지원으로 설립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판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해 9월 중순 어느 날 위르겐 힌츠페터라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독일인이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는 독일연방공화국 제1공영텔레비전방송(ARD)의 도쿄 특파원이라고 했다. 그는 청바지에다 티셔츠 바람에 카메라 장비를 담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있었다. 우리 사무실에는 교회 관계에서 일하는 독일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으나 방송기자가 찾아온 것은 처음이다. 그는 도쿄에서 일하는 독일 선교사 파울 슈나이스의 소개로 우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파울 슈나이스 목사는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정치적 억압과 인권 탄압에 항거하는 교회의 투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한국을 자주 방문해 한국 교회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독일 교회는 물론 세계 교회에 알리고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도쿄에 주재하는 외국 특히 독일 특파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의 실상을 취재하는 일을 돕기도 했다. 당시 위르겐 힌츠페터가 한국을 찾은 것은 그해 9월26일 명동성당에서 황성민 주교가 집전한 순교자 찬미기도회를 계기로 역사적 출발을 한 정의구현사제단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사제단은 첫 시국성명에서 유신체제 철폐, 지학순 주교 등 구속자 석방을 요구했다. 이 뜻깊은 정치적 미사에는 신부 40여명과 수녀 300여명이 참가해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참여가 본격화했다. 이미 개신교는 같은 해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들을 중심으로 목요기도회를 시작해 정치적으로 박해받는 구속자들의 석방과 함께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개신교의 목요기도회와 가톨릭의 정의구현사제단 시국미사는 당시 군사독재정권에 맞선 전체 기독교의 정치참여 운동의 본격적 시작이었다. 힌츠페터와 필자는 9월26일 저녁 8시께 명동성당으로 갔다. 당시 명동성당 아래에는 성모병원이 있었는데 그 입구부터 수십명의 전투경찰대가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성당에서는 미사가 끝난 것 같았고, 신부들과 수녀들 그리고 다수의 신자들이 명동으로 나와 시위를 벌이려고 했다. 길을 열어주지 않는 경찰과 신도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우리의 조명장비가 고장 나서 필자는 거의 100미터나 되는 낡은 전깃줄을 끌고 성모병원 안으로 들어가 전기 콘센트를 연결했다. 촬영을 시작하려는데 누군가가 병원 안에서 콘센트에서 전깃줄을 빼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앙정보부 요원의 짓이었다. 나는 끝까지 병원 안에 남아 힌츠페터가 촬영을 마칠 때까지 콘센트를 지켰고, 9시가 다 되어서 시위도 끝나고 촬영도 마칠 수 있었다. 몇 사람의 감시자들을 피해서 우리는 병원 뒤 담을 넘어 충무로 큰길로 나가 호텔로 돌아갔다. 다음날 나는 힌츠페터와 같이 종로5가에 있는 한국교회협의회(NCC) 사무실을 찾아가 당시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대부 역할을 하던 김관석 목사를 인터뷰했다. 그는 끈질기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남미 등 권위주의 정권들에 저항하는 집단들은 흔히 무력이나 폭력을 사용하거나 요인들을 암살하는데 왜 한국에서만은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느냐? 왜 이러한 끔찍한 정치적 탄압을 당하면서도 한국인들은 비폭력 저항만을 하느냐? 한국의 민족성 때문인가, 아니면 종교적 신념 같은 것 때문인가?” 김관석 목사의 대답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폭력저항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만큼은 기억난다. 인터뷰를 마친 뒤 종로4가를 지나다가 음식점 진열대의 찐만두를 본 힌츠페터는 자기 고향 음식 마울타셰(Maultasche)를 닮았다며 먹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고등학생들 틈에서 찐만두로 점심을 때웠다. 그는 맥주를 주문하려고 했으나 분식집에서는 팔지 않아 주인이 밖에서 사다 준 것을 한 잔씩 마셨다. 그는 독일의 제1티브이 방송기자로 넉넉한 출장비를 받았으나 호화 호텔에 묵거나 고급 식당에 가지 않고 와이엠시에이 호텔 같은 소박한 곳에 머물면서 검소한 생활을 했다. 1975년 11월에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나와 힌츠페터의 접촉은 끊어졌다. 그 뒤 1979년 박정희가 사망하고 18년간의 군사독재가 끝나자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도 한국의 민주화의 봄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사태는 그 반대로 가고 있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군부통치를 계속하려 했다. 국민의 저항은 더욱 강렬해졌고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다급해진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위대를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5월 독일 제1티브이는 거의 30~40분에 걸쳐 광주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잔혹한 시민학살 장면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방영했다. 독일 제2티브이에서도 계속해서 광주학살 장면이 방영되었다. 한인 동포들뿐 아니라 독일인들도 그 잔혹함에 크게 놀랐고 치를 떨었다. 나는 몇 번씩 반복되는 방송뉴스를 비디오테이프에 저장한 뒤 스위스 제네바의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일하고 있던 박상증 목사에게 연락해서 그 비디오테이프를 통해서 한국의 사정을 전세계와 교회들에 알리자고 했다. 그는 그 테이프를 가지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복사해서 유럽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 등 세계 각국의 교회들에 보내 한국의 처참한 실상을 알리는 일을 했다. 얼마 지나서 동네 서점에 가니 <분테>(Bunte)라는 여성잡지 표지에 광주 사진이 실려 있었고, 약 15개 면에 걸쳐 광주에서 벌어진 처참한 잔혹상을 다루고 있었다. 이 잡지는 영화배우나 상류층 사람들의 생활을 다루는 오락잡지였다. 나는 그 서점에 있는 20여권의 잡지를 다 사다 집에 보관하고 우리 집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88년 한국에 돌아와서 어느 날 명동성당 앞을 지나는데, 광주사건에 관한 사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사진들은 <분테>에 실렸던 것이었고, 다름 아닌 힌츠페터가 목숨 걸고 촬영했던 것이었다. 힌츠페터의 노력으로 광주사건의 진상이 전세계에 알려졌고 최근에는 <택시운전사>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한국인들도 그 실상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바라기는 이 끔찍한 민족적 비극의 실상이 모두 제대로 알려져 역사의 교훈으로 삼았으면 한다. 광주에 잠든 힌츠페터의 명복을 빈다.
성공회대 명예교수 1974년 나는 대학원을 나와 안병무 박사가 독일 교회의 지원으로 설립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판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해 9월 중순 어느 날 위르겐 힌츠페터라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독일인이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는 독일연방공화국 제1공영텔레비전방송(ARD)의 도쿄 특파원이라고 했다. 그는 청바지에다 티셔츠 바람에 카메라 장비를 담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있었다. 우리 사무실에는 교회 관계에서 일하는 독일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으나 방송기자가 찾아온 것은 처음이다. 그는 도쿄에서 일하는 독일 선교사 파울 슈나이스의 소개로 우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파울 슈나이스 목사는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정치적 억압과 인권 탄압에 항거하는 교회의 투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한국을 자주 방문해 한국 교회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독일 교회는 물론 세계 교회에 알리고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도쿄에 주재하는 외국 특히 독일 특파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의 실상을 취재하는 일을 돕기도 했다. 당시 위르겐 힌츠페터가 한국을 찾은 것은 그해 9월26일 명동성당에서 황성민 주교가 집전한 순교자 찬미기도회를 계기로 역사적 출발을 한 정의구현사제단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사제단은 첫 시국성명에서 유신체제 철폐, 지학순 주교 등 구속자 석방을 요구했다. 이 뜻깊은 정치적 미사에는 신부 40여명과 수녀 300여명이 참가해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참여가 본격화했다. 이미 개신교는 같은 해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들을 중심으로 목요기도회를 시작해 정치적으로 박해받는 구속자들의 석방과 함께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개신교의 목요기도회와 가톨릭의 정의구현사제단 시국미사는 당시 군사독재정권에 맞선 전체 기독교의 정치참여 운동의 본격적 시작이었다. 힌츠페터와 필자는 9월26일 저녁 8시께 명동성당으로 갔다. 당시 명동성당 아래에는 성모병원이 있었는데 그 입구부터 수십명의 전투경찰대가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성당에서는 미사가 끝난 것 같았고, 신부들과 수녀들 그리고 다수의 신자들이 명동으로 나와 시위를 벌이려고 했다. 길을 열어주지 않는 경찰과 신도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우리의 조명장비가 고장 나서 필자는 거의 100미터나 되는 낡은 전깃줄을 끌고 성모병원 안으로 들어가 전기 콘센트를 연결했다. 촬영을 시작하려는데 누군가가 병원 안에서 콘센트에서 전깃줄을 빼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앙정보부 요원의 짓이었다. 나는 끝까지 병원 안에 남아 힌츠페터가 촬영을 마칠 때까지 콘센트를 지켰고, 9시가 다 되어서 시위도 끝나고 촬영도 마칠 수 있었다. 몇 사람의 감시자들을 피해서 우리는 병원 뒤 담을 넘어 충무로 큰길로 나가 호텔로 돌아갔다. 다음날 나는 힌츠페터와 같이 종로5가에 있는 한국교회협의회(NCC) 사무실을 찾아가 당시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대부 역할을 하던 김관석 목사를 인터뷰했다. 그는 끈질기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남미 등 권위주의 정권들에 저항하는 집단들은 흔히 무력이나 폭력을 사용하거나 요인들을 암살하는데 왜 한국에서만은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느냐? 왜 이러한 끔찍한 정치적 탄압을 당하면서도 한국인들은 비폭력 저항만을 하느냐? 한국의 민족성 때문인가, 아니면 종교적 신념 같은 것 때문인가?” 김관석 목사의 대답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폭력저항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만큼은 기억난다. 인터뷰를 마친 뒤 종로4가를 지나다가 음식점 진열대의 찐만두를 본 힌츠페터는 자기 고향 음식 마울타셰(Maultasche)를 닮았다며 먹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고등학생들 틈에서 찐만두로 점심을 때웠다. 그는 맥주를 주문하려고 했으나 분식집에서는 팔지 않아 주인이 밖에서 사다 준 것을 한 잔씩 마셨다. 그는 독일의 제1티브이 방송기자로 넉넉한 출장비를 받았으나 호화 호텔에 묵거나 고급 식당에 가지 않고 와이엠시에이 호텔 같은 소박한 곳에 머물면서 검소한 생활을 했다. 1975년 11월에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나와 힌츠페터의 접촉은 끊어졌다. 그 뒤 1979년 박정희가 사망하고 18년간의 군사독재가 끝나자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도 한국의 민주화의 봄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사태는 그 반대로 가고 있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군부통치를 계속하려 했다. 국민의 저항은 더욱 강렬해졌고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다급해진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위대를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5월 독일 제1티브이는 거의 30~40분에 걸쳐 광주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잔혹한 시민학살 장면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방영했다. 독일 제2티브이에서도 계속해서 광주학살 장면이 방영되었다. 한인 동포들뿐 아니라 독일인들도 그 잔혹함에 크게 놀랐고 치를 떨었다. 나는 몇 번씩 반복되는 방송뉴스를 비디오테이프에 저장한 뒤 스위스 제네바의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일하고 있던 박상증 목사에게 연락해서 그 비디오테이프를 통해서 한국의 사정을 전세계와 교회들에 알리자고 했다. 그는 그 테이프를 가지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복사해서 유럽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 등 세계 각국의 교회들에 보내 한국의 처참한 실상을 알리는 일을 했다. 얼마 지나서 동네 서점에 가니 <분테>(Bunte)라는 여성잡지 표지에 광주 사진이 실려 있었고, 약 15개 면에 걸쳐 광주에서 벌어진 처참한 잔혹상을 다루고 있었다. 이 잡지는 영화배우나 상류층 사람들의 생활을 다루는 오락잡지였다. 나는 그 서점에 있는 20여권의 잡지를 다 사다 집에 보관하고 우리 집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88년 한국에 돌아와서 어느 날 명동성당 앞을 지나는데, 광주사건에 관한 사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사진들은 <분테>에 실렸던 것이었고, 다름 아닌 힌츠페터가 목숨 걸고 촬영했던 것이었다. 힌츠페터의 노력으로 광주사건의 진상이 전세계에 알려졌고 최근에는 <택시운전사>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한국인들도 그 실상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바라기는 이 끔찍한 민족적 비극의 실상이 모두 제대로 알려져 역사의 교훈으로 삼았으면 한다. 광주에 잠든 힌츠페터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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