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정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파기환송심에서 유죄로 선고됐다. 국가기관이 이처럼 조직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선거에 관여한 전례가 없다는 재판부의 판시를 보면서 문득 두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한 편은 지난해 독일행을 앞두고 보았던 독일 영화 <타인의 삶>, 또 다른 한 편은 우리 영화 <택시운전사>다. 두 영화의 배경은 모두 1980년대다. 도너스마르크 감독 작품 <타인의 삶>의 주인공은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대위 비슬러, 공직자로서의 자긍심을 지닌 엘리트다. 어느 날 그는 상관으로부터 극작가 게오르크 드라이만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그의 집에 감청장치를 설치해 사생활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자신에게 부여된 업무가 극작가의 연인을 노리는 문화부 장관의 탐욕 때문임을 알게 된다. 더불어 자신이 속한 조직이 이미 공적 기능을 상실했음을 직감한다. 그는 감시 업무 대신 극작가를 보호하는 역할을 비밀리에 해내다 발각이 되고, 지하실에서 편지를 검열하는 하급 업무를 맡는다. 독일에 머무는 동안 <타인의 삶>의 배경이자 실제 촬영 장소였던 베를린의 슈타지박물관을 가보았다. 엄청난 분량의 감청과 도청 기록들이 보관돼 있었다. 1980년대, 슈타지 공식 직원 수는 10만명, 비공식 정보원은 20만명에 달했다. 동독 국민 4명당 1명에 해당하는 수다. 슈타지-경찰-조력자-자발적인 정보원으로 중층화된 감시망은 동독의 일상이었다. 전화를 마치고 나서 잘 들었냐는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고 한다. 소련의 케이지비(KGB)를 모델로 창설한 슈타지의 구성원들은 동독의 최고 엘리트였다. 그들 대부분은 그저 시스템이 시키는 일을 수행할 뿐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에서 열린 유대인 학살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말한 ‘악의 평범성’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조직에 관여한 이들은 통일독일(통독)의 공무원이 되거나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통독의 법은 슈타지 식당에서 일한 요리사조차도 공무원이 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친일경찰들의 해방 후 변신과 행보가 어떠했는지 돌아봐지는 대목이다. 벌써 천만 관객을 넘어선 장훈 감독의 영화 <택시운전사>. 5·18 당시 목숨을 걸고 광주의 실상을 알려 제2회 송건호 언론상을 수상한 실존 인물, 힌츠페터와 그를 광주로 태우고 간 택시운전사의 이야기다. 가장 울컥했던 장면은 딸 걱정에 마음이 조급해진 택시기사 만섭(송강호)이 힌츠페터를 광주에 남겨두고 급히 상경하다가 도중에 차를 돌리는 장면이다. ‘제3한강교’ 노래를 부르며 서울로 가던 만섭은 이내 눈시울을 붉힌다. 그는 차를 세우고 딸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다”고 말하고 죽음의 땅 광주로 차를 돌린다. 그건 80년 당시 광주시민들의 마음이기도 했다. 평범한 소시민이 총칼 앞에 목숨을 내놓는 것이 어찌 쉬웠겠는가. 하지만 이웃이, 친구가 무자비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외면하는 것은 더 힘들었기에 광주 사람들은 사지로 뛰어들었다. <타인의 삶>의 비밀경찰이 강등을 무릅쓰고 자신의 직업윤리를 지키는 모습, <택시운전사>의 평범한 기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사지로 차를 돌리는 모습. 이것이 바로 보통 사람들이 세상을 지켜온 자기 윤리의 힘이었다. 슈타지는 청산의 대상이 됐지만 우리의 국정원은 어떤가. 지난해 통과한 테러방지법으로 더 교묘한 합법의 옷을 입고 국민을 상대로 불법 도감청과 사찰을 해왔다. 그뿐만 아니라 공직자들을 선거에 동원해 댓글부대 노릇을 하게 했다. 국정원의 그릇된 행보로 나 역시 수년 동안 고통을 겪어왔다. 국정원 직원의 불법 여론조작 현장을 확인하려다 이종걸, 김현 등 동료 의원들과 함께 감금혐의로 고발을 당했다. 그 뒤 5년 동안 고통스러운 재판은 계속됐고 지난 7월 서울고법은 원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검찰이 다시 상고를 한 상태다. 통일 직후 시민들은 슈타지 건물을 점거했다. 증거 인멸을 우려해서였다. 정부는 정보문건 열람 시스템을 만들고 시민에게 자신과 관련된 정보를 볼 수 있도록 공개했다. 그리고 연방의회 내에 ‘독재청산위원회’를 만들고 역사청산재단을 설립했다. ‘보복’이나 ‘응징’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스템으로 사회를 바꿔내기 위해서였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유죄판결도 일탈한 한 개인에 대한 판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시민을 권력의 감시 대상으로, 공직자를 권력의 행동대원으로 여기는 낡은 시대의 유산을 청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영화가 보여주듯 평범한 택시운전사, 직분에 충실하고자 하는 공직자들이 목숨을 걸지 않아도 ‘인간’이라는 가치와 ‘자기 윤리’를 지킬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다져야 한다. 이것은 국가권력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이자 더 나은 사회로 가는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파기환송심에서 유죄로 선고됐다. 국가기관이 이처럼 조직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선거에 관여한 전례가 없다는 재판부의 판시를 보면서 문득 두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한 편은 지난해 독일행을 앞두고 보았던 독일 영화 <타인의 삶>, 또 다른 한 편은 우리 영화 <택시운전사>다. 두 영화의 배경은 모두 1980년대다. 도너스마르크 감독 작품 <타인의 삶>의 주인공은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대위 비슬러, 공직자로서의 자긍심을 지닌 엘리트다. 어느 날 그는 상관으로부터 극작가 게오르크 드라이만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그의 집에 감청장치를 설치해 사생활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자신에게 부여된 업무가 극작가의 연인을 노리는 문화부 장관의 탐욕 때문임을 알게 된다. 더불어 자신이 속한 조직이 이미 공적 기능을 상실했음을 직감한다. 그는 감시 업무 대신 극작가를 보호하는 역할을 비밀리에 해내다 발각이 되고, 지하실에서 편지를 검열하는 하급 업무를 맡는다. 독일에 머무는 동안 <타인의 삶>의 배경이자 실제 촬영 장소였던 베를린의 슈타지박물관을 가보았다. 엄청난 분량의 감청과 도청 기록들이 보관돼 있었다. 1980년대, 슈타지 공식 직원 수는 10만명, 비공식 정보원은 20만명에 달했다. 동독 국민 4명당 1명에 해당하는 수다. 슈타지-경찰-조력자-자발적인 정보원으로 중층화된 감시망은 동독의 일상이었다. 전화를 마치고 나서 잘 들었냐는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고 한다. 소련의 케이지비(KGB)를 모델로 창설한 슈타지의 구성원들은 동독의 최고 엘리트였다. 그들 대부분은 그저 시스템이 시키는 일을 수행할 뿐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에서 열린 유대인 학살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말한 ‘악의 평범성’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조직에 관여한 이들은 통일독일(통독)의 공무원이 되거나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통독의 법은 슈타지 식당에서 일한 요리사조차도 공무원이 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친일경찰들의 해방 후 변신과 행보가 어떠했는지 돌아봐지는 대목이다. 벌써 천만 관객을 넘어선 장훈 감독의 영화 <택시운전사>. 5·18 당시 목숨을 걸고 광주의 실상을 알려 제2회 송건호 언론상을 수상한 실존 인물, 힌츠페터와 그를 광주로 태우고 간 택시운전사의 이야기다. 가장 울컥했던 장면은 딸 걱정에 마음이 조급해진 택시기사 만섭(송강호)이 힌츠페터를 광주에 남겨두고 급히 상경하다가 도중에 차를 돌리는 장면이다. ‘제3한강교’ 노래를 부르며 서울로 가던 만섭은 이내 눈시울을 붉힌다. 그는 차를 세우고 딸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다”고 말하고 죽음의 땅 광주로 차를 돌린다. 그건 80년 당시 광주시민들의 마음이기도 했다. 평범한 소시민이 총칼 앞에 목숨을 내놓는 것이 어찌 쉬웠겠는가. 하지만 이웃이, 친구가 무자비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외면하는 것은 더 힘들었기에 광주 사람들은 사지로 뛰어들었다. <타인의 삶>의 비밀경찰이 강등을 무릅쓰고 자신의 직업윤리를 지키는 모습, <택시운전사>의 평범한 기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사지로 차를 돌리는 모습. 이것이 바로 보통 사람들이 세상을 지켜온 자기 윤리의 힘이었다. 슈타지는 청산의 대상이 됐지만 우리의 국정원은 어떤가. 지난해 통과한 테러방지법으로 더 교묘한 합법의 옷을 입고 국민을 상대로 불법 도감청과 사찰을 해왔다. 그뿐만 아니라 공직자들을 선거에 동원해 댓글부대 노릇을 하게 했다. 국정원의 그릇된 행보로 나 역시 수년 동안 고통을 겪어왔다. 국정원 직원의 불법 여론조작 현장을 확인하려다 이종걸, 김현 등 동료 의원들과 함께 감금혐의로 고발을 당했다. 그 뒤 5년 동안 고통스러운 재판은 계속됐고 지난 7월 서울고법은 원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검찰이 다시 상고를 한 상태다. 통일 직후 시민들은 슈타지 건물을 점거했다. 증거 인멸을 우려해서였다. 정부는 정보문건 열람 시스템을 만들고 시민에게 자신과 관련된 정보를 볼 수 있도록 공개했다. 그리고 연방의회 내에 ‘독재청산위원회’를 만들고 역사청산재단을 설립했다. ‘보복’이나 ‘응징’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스템으로 사회를 바꿔내기 위해서였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유죄판결도 일탈한 한 개인에 대한 판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시민을 권력의 감시 대상으로, 공직자를 권력의 행동대원으로 여기는 낡은 시대의 유산을 청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영화가 보여주듯 평범한 택시운전사, 직분에 충실하고자 하는 공직자들이 목숨을 걸지 않아도 ‘인간’이라는 가치와 ‘자기 윤리’를 지킬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다져야 한다. 이것은 국가권력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이자 더 나은 사회로 가는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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