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헌권
목사·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시민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높다. 특히 분단체제에서 왜곡된 구조에 대한 개혁 열망이 크다. 분단체제가 70년이 넘었다. 인간의 기본권인 가족과 함께 사는 행복마저도 박탈된 이가 있다. 국가보안법으로 30여년 옥살이를 시키고 부모형제를 만날 수 없게 인권유린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서옥렬 선생은 소위 장기구금 양심수다. 1927년 전남 신안군 안좌면에서 5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이지만 학구열이 대단해 서울로 가 초·중·고를 다니고, 고려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터졌다. 청년은 학도의용군으로 북으로 갔다. 교원 생활을 하면서 같은 학교 교원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다. 1961년 남북이 서로 공작원을 보낼 때 서 선생은 공작원으로 내려왔다. 임무는 고향에 있는 동생을 만나는 것. 가족과 짧은 해후를 마치고 월북하던 중 붙잡힌다. “사형 구형을 받는 순간 심장이 딱 멈춘 것 같았다”고 그는 회고한다.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감옥생활 29년을 했다. 그는 30대에 분단의 장벽을 오간 혐의로 넬슨 만델라보다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청장년 시절을 송두리째 감옥에 갇혀 있었다. 거기에 부모형제들에게도 연좌제가 씌워져 더할 수 없이 지난한 세월이었다. 1990년 가석방됐지만, 2000년 장기수 63명이 북송될 때 그는 가지 못했다. 바로 준법서약서가 걸림돌이었다. 반강제로 준법서약서에 직인을 찍어 송환되지 못했다. 사회로 나가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준법서약서였다. 그것이 마치 전향서처럼 왜곡된 것이다. 서 선생은 오래전 고문과 협박 강요로 한쪽 눈이 멀어 성치 않은 가운데 홀로 끼니를 해결하면서 살고 있다. 탈장과 심장질환, 관절염으로 발까지 온몸이 불편한 독거노인으로 분단의 아픔을 살고 있다. 마지막 희망은 처자식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는 것이다. 가슴엔 아내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품고 있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은 남북기본합의서, 6·15남북공동선언을 통해 이미 합의한 사항이다. 이제 촛불시민혁명으로 시작된 정부가 처절한 삶을 산 구순의 노인과 회갑이 훨씬 넘은 아들들이 만날 수 있도록 견우직녀 오작교가 되어야 한다. 빛고을 광주의 행동하는 양심들이 서 선생을 비롯한 장기수들이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인도적 차원에서 함께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분단 적폐를 청산하고 남북관계도 복원해야 한다. 이산가족 상봉, 장기구금 양심수 송환은 인도적 차원에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 어떤 이념도 사상도 장벽도 잠시 걷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행복을 지키는 국가의 통 큰 아량을 보여줄 때다. 또한 양심수를 석방 후에도 옭아매는, 창살 없는 감옥으로 불리는 보안관찰법도 사라져야 한다. 서옥렬 선생을 비롯한 비전향 장기수들이 2차로 송환돼 마지막 여생을 가족들 품에서 보내기를 희망한다. 얼마 후면 민족의 최대 명절인 추석이다. 누구나 보름달처럼 한지붕 아래 오붓하게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목사·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시민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높다. 특히 분단체제에서 왜곡된 구조에 대한 개혁 열망이 크다. 분단체제가 70년이 넘었다. 인간의 기본권인 가족과 함께 사는 행복마저도 박탈된 이가 있다. 국가보안법으로 30여년 옥살이를 시키고 부모형제를 만날 수 없게 인권유린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서옥렬 선생은 소위 장기구금 양심수다. 1927년 전남 신안군 안좌면에서 5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이지만 학구열이 대단해 서울로 가 초·중·고를 다니고, 고려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터졌다. 청년은 학도의용군으로 북으로 갔다. 교원 생활을 하면서 같은 학교 교원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다. 1961년 남북이 서로 공작원을 보낼 때 서 선생은 공작원으로 내려왔다. 임무는 고향에 있는 동생을 만나는 것. 가족과 짧은 해후를 마치고 월북하던 중 붙잡힌다. “사형 구형을 받는 순간 심장이 딱 멈춘 것 같았다”고 그는 회고한다.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감옥생활 29년을 했다. 그는 30대에 분단의 장벽을 오간 혐의로 넬슨 만델라보다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청장년 시절을 송두리째 감옥에 갇혀 있었다. 거기에 부모형제들에게도 연좌제가 씌워져 더할 수 없이 지난한 세월이었다. 1990년 가석방됐지만, 2000년 장기수 63명이 북송될 때 그는 가지 못했다. 바로 준법서약서가 걸림돌이었다. 반강제로 준법서약서에 직인을 찍어 송환되지 못했다. 사회로 나가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준법서약서였다. 그것이 마치 전향서처럼 왜곡된 것이다. 서 선생은 오래전 고문과 협박 강요로 한쪽 눈이 멀어 성치 않은 가운데 홀로 끼니를 해결하면서 살고 있다. 탈장과 심장질환, 관절염으로 발까지 온몸이 불편한 독거노인으로 분단의 아픔을 살고 있다. 마지막 희망은 처자식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는 것이다. 가슴엔 아내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품고 있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은 남북기본합의서, 6·15남북공동선언을 통해 이미 합의한 사항이다. 이제 촛불시민혁명으로 시작된 정부가 처절한 삶을 산 구순의 노인과 회갑이 훨씬 넘은 아들들이 만날 수 있도록 견우직녀 오작교가 되어야 한다. 빛고을 광주의 행동하는 양심들이 서 선생을 비롯한 장기수들이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인도적 차원에서 함께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분단 적폐를 청산하고 남북관계도 복원해야 한다. 이산가족 상봉, 장기구금 양심수 송환은 인도적 차원에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 어떤 이념도 사상도 장벽도 잠시 걷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행복을 지키는 국가의 통 큰 아량을 보여줄 때다. 또한 양심수를 석방 후에도 옭아매는, 창살 없는 감옥으로 불리는 보안관찰법도 사라져야 한다. 서옥렬 선생을 비롯한 비전향 장기수들이 2차로 송환돼 마지막 여생을 가족들 품에서 보내기를 희망한다. 얼마 후면 민족의 최대 명절인 추석이다. 누구나 보름달처럼 한지붕 아래 오붓하게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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