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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시발비용과 영수증 / 박솔희

등록 2017-10-16 18:09수정 2017-10-16 21:47

박솔희
제주 사는 여행작가

추석 연휴, 친구들과 명절 인사를 주고받다가 몹시 슬퍼졌다. 사실상 연휴에도 집에서 일을 해야 하는 현실에 애달픔을 느낀 친구가 연휴 전날 퇴근하던 중 눈에 띄는 나이키 매장에 들어가서 마이클 조던의 얼굴이 그려진 10만원짜리 후드티를 사버렸다는 것이다. 20만원짜리 블루투스 이어폰도 샀다고 했다.

그렇게 쓴 30만원을 친구는 ‘시발비용’이라 불렀다. 요즘 직장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시발비용’이라는 용어는 ‘스트레스를 받아 지출하게 된 비용’을 뜻한다. 누구나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순간 일탈적인 행동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예상 밖의 지출이 좀 있었다고 해도, 내 마음이 더 소중한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이런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며 악순환이 된다는 점이다. 이 친구는 지난달, 끝이 보이지 않는 야근에 입사 3년 만에 세번째로 진지하게 퇴사 생각을 하다가(이미 두번이나 사표를 냈지만 반려됐다) 월급의 전액에 달하는 카드값 영수증이 날아오는 바람에 사표를 다시 서랍에 넣었던 적이 있다.

장안의 화제인 팟캐스트 <영수증>을 진행하는 김생민씨라면 뭐라고 말할까? 스튜핏! 한달치 영수증을 보내면 통쾌한 재무 상담을 해주는 김생민씨는 성실하고 알뜰한 연예인의 대명사다. 데뷔 후 각종 연예 프로에 3초, 7초씩이라도 출연을 거르지 않으며 큰 대박 없이도 오랜 기간 자리를 지켜왔다. 커리어에 대한 태도만큼이나 돈 관리에도 일관된 자세를 견지한다. 허무맹랑한 대박을 바라기보다는 당장 손안에 든 걸 한 푼 두 푼 아끼는 재테크로 타워팰리스에 사는 ‘서민 갑부’가 됐다.

지금 우리 사회에 김생민이 유의미한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알뜰한 소비의 참의미, 저축의 참기쁨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아껴야 잘산다’는 지난 평범한 시대의 명제는 ‘월급쟁이는 다 소용없고’ ‘티끌은 모아봤자 티끌’ 되는 세상이 오며 와르르 무너졌다. 초등학생은 연예인, 대학생은 건물주를 꿈꾸는 세상에서 우리는 티끌을 저축하는 대신 로또를 사며 부모를 원망해왔다. ‘이생망’을 말하면서 이번 생은 어차피 망했으니 희망이 없다고 한탄했다.

사실 우리가 ‘시발비용’을 쓰며 ‘이생망’을 말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이런 집단적 유희 없이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압박적임을 방증한다. ‘시발비용’은 ‘탕진잼’으로 이어지기 쉽다. 탕진잼은 ‘일상생활에서 돈을 낭비하듯 쓰며 소비의 재미를 추구하는 행태’를 의미한다. 가끔 ‘탕진잼’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당사자임에도 나는 이 말을 아주 싫어한다. 젊은이들이 5년이나 3년, 빠르면 1년 안에 퇴사를 하고 ‘퇴직금 탕진 여행’을 떠나는 사회가 그다지 건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탕진이 뭐가 재밌나? 허무하지. 하지만 직장생활의 매 순간순간이 허무한 우리는 그 허무감을 포장하며 위안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 차라리 그게 재미있는 일이라고 믿어버리는 ‘탕진잼’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다음은? 탕진한 ‘텅장’(텅 빈 통장)의 잔고를 메우기 위해 다시 전쟁 같은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대안 없는 탕진은 그냥 탕진이고 낭비일 뿐이다.

일과 생활의 평범한 균형을 바라는 성실한 직장인들의 영수증이 더는 ‘시발비용’으로 채워지지 않았으면 한다. 긴 연휴 다음, 새로운 마음으로 출근하는 모든 직장인들의 발걸음에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이 깃드는 새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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