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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소방관을 위한 변명 / 유의태

등록 2018-02-05 18:02수정 2018-02-05 21:28

유의태
전 충청강원119특수구조대장·소방방재IT전공 교육학박사

충남 천안에 있는 중앙소방학교 정문 입구에 들어서면 ‘명예 신뢰 헌신’이 새겨진 교훈석을 볼 수 있다. 소방공무원은 입문부터 일반 공무원과 다른 채용 과정을 거친다. 필기시험과 체력시험에 합격하면 신체검사를 거쳐 면접으로 최종 합격자가 된다. 이렇게 합격한 예비 소방공무원은 16주 합숙을 하며 119 정신을 배우고 실무능력을 체득한다. 소방서에 배치된 신임에게 곧바로 중책이 맡겨지지는 않는다. 현장에서 선임자의 진압업무 보조와 현장 안전업무를 하면서 현장감각을 익히고, 전문 소방관으로 성장하게 된다.

화재 현장의 최일선에서 소방호스 노즐을 잡고 최초로 불과 맞서는 소방관을 ‘관창수’라고 하는데, 이 임무는 119안전센터의 베테랑에게 주어진다. 관창수는 시작 단계에서 현장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여 화세를 제압하고 인명구조 통로를 개척하며 진압작전을 주도한다. 관창수는 연기와 불꽃을 보고 화재 발화 단계와 성상(불의 특성. Fire Behavior)을 판단하여야 한다. 위험물이나 불에 타는 가연물의 종류에 따라 공략하는 방법이 결정되면 진입로와 퇴로를 선정하여 불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분초를 다투는 일이다. 화점을 향해 노즐의 각도를 얼마나 잘 맞추고, 얼마나 미세하게 물줄기를 잘 조절하느냐가 진압작전의 성패를 좌우한다.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전문기술을 겸비하고, 현장 경험을 통해 체득한 동물적 감각이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베테랑 소방관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방관도 사람이다. 소방관은 직업 특성상 가장 먼저 끔찍한 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수습하여야 한다. 때로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현장에서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불과 싸워야 한다. 현장에서 겪는 사건 충격이 쌓이면 안으로부터 곪는 트라우마로 전이된다. 특히 제천이나 밀양 화재 참사의 참혹한 현장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깊은 상처로 남는다.

이러한 트라우마를 앓는 소방관은 대부분 직장이나 가정에서 누구에게도 아픔을 털어놓지 못한다. 혼자 감내하고 극복을 시도한다. 가정에서는 강인한 가장, 직장에서는 훌륭한 소방관이 되어야 하는 현실에서 그 깊은 마음의 상처는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다. 그러나 상처가 깊어질수록 불면증과 우울증이 심해진다. 흔히 말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게 되는 것이다.

대구지하철 참사 때 출동한 한 소방관은 몇 사람을 지상으로 구조한 뒤 탈진한 상태에서 넘어져 구조하고 나오던 사람의 손을 놓쳐버렸다. 15년이 지났지만 그는 지금도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돌아서면 놓쳐버린 손이 연상돼 괴로워한다. 함께 근무한 동료를 잃거나 어린아이들의 사고를 목격하게 되면 구조하지 못하고 혼자만 살았다는 죄책감을 평생 안고 간다. 소방관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할 운명이다.

이번 제천과 밀양의 화재 참사를 지켜보면서 퇴직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소방관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나마 버팀목이 되었던 자부심, 명예가 심각하게 손상되고 무너졌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맞섰던 화재 진압 작전 과정을 비전문가들이 잘잘못을 판단하겠다며 질타하고, 소방서가 압수수색되는 과정을 보면서, 이런 분위기를 감내하기 힘들다고 한다.

화재방어 검토회의라는 것이 있다. 일정 규모 이상의 화재와 사상자가 발생한 현장에 출동하면, 10일 이내에 출동한 소방관들이 현장 부검을 하듯 출동 단계부터 현장 활동 과정을 꼼꼼하게 복기한다. 현장의 영상과 무전교신, 팀별·개인별 활동 상황을 분석해 잘못이나 실수가 없었는지, 개선할 점은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보완해가는 작업이다. 그 밖에 화재 조사나 내부 감찰을 통한 재검증도 있다. 소방 활동의 적정성 판단은 전문가인 소방관이 주도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소방전문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연마한 전문지식과 기술, 10㎏이 넘는 장비를 감당하며 다른 생명을 구할 체력,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119 소방정신, 현장 경험에서 익힌 동물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 소방관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손상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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