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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왜냐면] 진은숙 그리고 표류하는 서울시향 / 류재준

등록 2018-02-07 18:37수정 2018-02-07 19:39

류재준 작곡가

참담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것이 서울시향의 현주소다. 상임지휘자, 상임작곡가, 사장조차도 없이 표류하고 있는 현재의 서울시향은 우리 모두의 저열한 합작품이다.

서울시향이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 것은 정명훈의 고액연봉 문제부터다. 아무리 봐도 세계 음악계에 대한 별 상식이 없는 진보 측 비전문가들이 들고일어난 이 문제는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이슈의 중심에 섰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정명훈은 능력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고, 이는 해외의 주요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들과 비교해도 과분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명훈에게 주는 정도의 대우면 세계 초일류 지휘자의 영입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세계적인 지휘자들이 서울시향에 줄을 서서 오려고 하는가.

일류급 지휘자들은 한해 100~150번의 연주를 소화한다. 게르기예프 같은 지휘자는 하루에 두 번씩 공연하기도 한다. 이들이 한국에서 공연하려면 10~15시간의 비행기 탑승이 필요하고 하루 이상의 휴식이 필수다. 해외 일류 오케스트라처럼 한두 번의 리허설 후 바로 연주하기도 어렵다. 많은 시간을 들여 연습시켜야 하고 시차와 피로를 고려한다면 그들이 한국행을 선택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 시간에 다른 좋은 오케스트라와 두 번 이상 공연할 수 있는데 굳이 한국에 올 필요 없다. 작년에 문제가 되었던 리카르도 무티의 고액 개런티는 바로 그런 이유에서 책정된 거다.

작곡가 진은숙의 퇴임은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보여준다.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를 비판하는 이들의 논리는 기초과학에 투자하지 않으면서 노벨상 타령하는 것과 같다. 유료 관객 수를 이유로 이를 비판한 한국 정치가의 말은 해외토픽에 나올 만하다.

세계 무대에서 아르스 노바만큼 화려한 연주진에 좋은 작품을 선보이는 곳이 많지 않다. 이제껏 아르스 노바가 선정한 솔리스트와 지휘자의 수준은 지금까지 한국 현대음악계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내부 회원 작품을 위주로 주고받기식 해외 교류에 익숙해진 한국의 현대음악계로선 아르스 노바의 발자취는 가뭄에 단비와도 같다. 그런데 오히려 한국의 현대음악계는 아르스 노바를 그리 반기지 않는다. 그들의 입장으로선 본인과 상관없는 잔치인 것이다. 한국의 수많은 현대음악 단체, 음악제, 협회가 몇십년 동안 하지 못한 기능을 수행해낸 아르스 노바가 그들에게는 자신의 공고한 자리를 위협하는 목 밑의 창으로 변한 것이다.

진은숙은 아르스 노바뿐 아니라 위기에 빠진 서울시향을 어떻게라도 살리기 위해 공연 전반의 기획까지 담당했고 그중 일부는 무보수로 일하기도 했다. 그녀의 지원과 지도를 받은 젊은 작곡가들이 세계 무대에서 작품을 연주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키운 인재에 진은숙이 숟가락만 올리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고 폄하한다. 대체 불가능한 자원이었던 진은숙을 퇴임시킨 일등공신이 그들이다.

서울시향이 도약기를 시작한 것은 이명박 서울시장 때부터다. 오세훈을 거쳐 지금의 박원순 시장까지 서울시 집권정당이 바뀌며 이를 비판하는 이들의 진영도 같이 움직였다. 정명훈을 찍어 내려고 불붙인 곳은 진보진영이었고 진은숙을 비판한 곳은 보수정당이었다. 이들의 비난과 비판은 공공의 이익이 아닌 진영논리로 차 있고 서울시향은 상호비판의 수단으로 전락되었다. 줄줄이 새는 목적 없는 사업과 무분별한 해외연수만 자제해도 아르스 노바 정도는 충분히 지원할 수 있을 거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곧 자신의 이익과 직결되어 있다. 내가 낄 수 없고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무관심해진다. 자신의 이익과 진영을 건드리면 무리를 지어 달려든다. 그들에게는 대의가 없고 공공의 이익과 국가 차원의 문화 향상에도 관심이 없다. 이들을 달래며 이끌어 나가야 하는 집단이 정치가와 음악계의 명망있는 지도층이지만 이들이 진영논리에 갇혀 있다. 지금 국민의 세금과 뛰어난 인재들에 의해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진 소중한 공공재가 망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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