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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왜냐면] 기억을 ‘해체’하는 일 / 문정빈

등록 2018-04-02 18:47수정 2018-04-02 19:02

문정빈
서울시 은평구 응암동

가슴이 도려진 채 숨이 붙은 여자가 풀숲에 누워 있다. 열아홉의 소녀, 응우옌티탄. 아직 살아 있었고, 두 가슴과 팔에서 피가 흘렀다. 소녀는 그렇게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나이가 들어, 몸의 모든 기능이 서서히 소멸해 가는 죽음일지라도 죽음은 나와 나의 가족, 나와 연결된 세계에 깊은 자국을 남기는 일이다. 그렇다면 모음을 한 획 옮겨 죽음이 아닌 ‘죽임’이라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잔혹한 ‘죽임’이 한 영토에서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 땅에 과거와 현재, 미래에 엄청난 상실과 상처의 자국을 남긴 일일 것이다.

1968년 2월12일. 베트남 퐁니·퐁넛 마을에서는 한국군에 의한 잔혹한 ‘죽임’들이 있었다. 책 <1968년 2월12일 ―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고경태 지음)는 그 죽임의 시간과,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기억을 담아낸다. 책은 기억에 그치지 않는다. 그 죽임은 1947년 3월 제주의 시간을 재현했고, 12년 뒤 1980년 5월 광주의 시간을 예고했다.

그리고 모든 잔혹한 ‘죽임’들이 ‘불가피함’이 아니었음을 이야기한다. 독일의 아우슈비츠, 베트남의 퐁니 마을, 일제 식민지 치하의 한반도, 그리고 우리 안의 수많은 학살들. 그래서 가해와 피해의 시간들은 냉전체제라는 하나의 선 위에 존재하며, 전쟁이나 준전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났던 역사가 아니라, 전쟁 그 자체가 전쟁의 목적임을 말한다.

기억에 그치는 것은 ‘절반의 기억’에 머문다. 한국군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가해자였던 동시에 국가에 의해 동원된 피해자였다. 제주 4·3은 해방공간에서 처음 본격적으로 자행된 국가폭력이었지만, 국가폭력이라는 기억에 그치는 일은 제주가 ‘항쟁의 주체’로 존재한 시간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시간 속에는 우리 안의 ‘순결의 훼손’이라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존재했고, 이로 인해 피해 사실을 폭로하지 못하고 ‘죄인’처럼 숨죽여 살아야 했던 시간이 존재한다.

그래서 기억은 해체돼야 한다. 1968년 74명의 마을 주민이 한국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했다가 아닌, ‘응우옌티탄’과 같은 수많은 죽임이 우리의 안과 밖에 존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냉전체제 속에서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던 모든 기억들을 꺼내 끊임없이 해체해 나가야 한다.

기억은 시작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과 민간인 학살에 대해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의 선 위에 존재한 그 시간들을 바라보고, 해체하는 일. 거기서 기억의 치유는 시작된다.

두 가슴이 도려진 채 풀숲에 누워 있던 여자. 숨이 붙어 있어 고통스러워하던 여자. 그 아픈 기억은 한 사람이 죽임당한 사건이 아닌 모든 고통의 과거 속에서 다시 해체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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