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일 동국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
새 정부 들어 대학의 가장 큰 이슈 중의 하나는 총장 선출 방식, 즉 직선제 도입이다. 대학 경영의 책임자를 민주적인 절차에 입각하여 구성원들이 직접 선출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대학 운영의 안정성을 보장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당연해 보이는 원칙이 그동안 대학 내부에서 적지 않은 내홍을 거치면서 훼손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를 지켜보면서 민주주의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켜져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80년대 민주화운동 이후 대부분의 대학들이 직선제를 시행했으나, 학내에 파벌과 반목을 낳고 공약이 남발되는 폐단을 이유로 많은 사립대는 다시 간선제로 회귀하였고, 국립대도 이명박 정부 시절 교육과학기술부의 권고에 따라 대부분 간선제로 전환하였다. 여기서 총장 선출 방식이 변화하게 된 배경을 한번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2012년 당시 이명박 정부는 국립대학의 총장 후보자 직선제 방식을 개선하는 이른바 ‘2단계 국립대학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교육역량강화사업 지원 대학의 선정에 이 기준을 결정적인 평가지표로 삼았다. 이로써 당시 교육과학기술부와 ‘총장 직선제 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협약에 참여하지 않은 일부 국립대가 국가 재정지원 사업에서 탈락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치권력의 폭거는 헌법 제31조 제4항의 규정인 대학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것이기도 했다. 말이 권고이지 당시 정부는 대학지원사업의 선정에 간선제 도입 여부를 주요 평가지표로 삼았고, 대학들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결과 2015년 국립대 교수의 투신이라는 뼈아픈 사건도 겪었다. 이렇듯 국립대 총장 후보자 선출의 간선제 관행으로 인해 사립대도 재단의 의지를 쉽게 반영할 수 있는 총장 선출 방식이라는 덤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불행한 과정이 현재에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사실 간선제도 장점이 많은 제도이다. 선진국 대학에서는 대부분 간선제로 총장을 선출하는 것이 정착되어 있다. 이를 둘러싸고 잡음이 생기는 일도 거의 없다. 이는 구성원, 후보추천위원회, 이사회 사이에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서구 선진국에서 간선제 선출 방식은 구성원들의 무관심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일종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동시에 대의제로 선출된 총장과 학교 행정 책임자들에 대한 견제 장치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촛불시위가 우리에게 남긴 역사적 사명은 고전적인, 아니 원형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국민 참여의 공간에 재확립하자는 것이리라.
지난 우리의 촛불시위를 목격한 동시대 최고의 프랑스 철학자인 알랭 바디우는 한 인터뷰에서 촛불시위를 ‘역동적 민주주의’라고 극찬한 적이 있다. 그렇다. 현재 대학가에 봇물 터지듯 등장하고 있는 총장 직선제 요구도 그동안 대의제로 인해 정체된 민주주의에 생명력을 부여함으로써 절차적 민주주의의 가치를 복원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만하다.
특히 최근 직선제 논의에서 학생들의 의사가 반영되는 점은 과거의 직선제에 비해 한층 진전된 모습이라 평가할 만하다. 대학 구성원 간의 투표권 비중에 대한 협상 과정은 인내심 있는 숙의 과정을 필요로 하지만, 이를 두고 지나치게 신경전을 벌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의를 위해 각 주체가 조금씩 양보하면 대학별 여건에 맞는 비율을 합의해낼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합리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원만히 직선제 선출을 이룬 대학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한 독일 근대 대학, 신학 중심의 중세적 학제를 근대 학문으로 변혁한 연구 중심 대학, 설립자로부터 독립된 이사회 운영이 정착된 미국의 명문 사립대 등과 같은 역사적 사례는 대학의 자율성이 바로 대학 발전의 원동력임을 보여준다. 대학의 자율성 확보는 물론, 대학 운영에서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총장의 직선제 선출은 오늘날의 시대정신에 보다 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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