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예지
서울시 동작구 대방동·대학생 최근 한국 사회의 화두는 ‘혐오’다. 여성들이 그동안 참아왔던 성폭력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외모나 행동을 통해 여성에게 가해졌던 코르셋을 벗어 던지겠다는 선언 모두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와 맞서겠다는 말이다. 한반도 평화 상황도 마찬가지다. 최근 정상회담은 그동안 남북이 서로 적대하고 혐오했던 상황에서 벗어나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로 가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모두 혐오에 맞서 더 나은 사회로 가자는 움직임이다. 난민을 받지 말자는 주장은 혐오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난민으로 인해 성폭력 범죄가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하지만 이는 이슬람과 난민에 대한 혐오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성범죄 우려는 남성 전체에 대한 두려움에서 발생한다. 성범죄는 ‘남성’이라는 가부장적 사회의 권력자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충분히 가질 수 있는 두려움이다. 하지만 성범죄 예방을 위한 비판의 초점은 성범죄를 일으키고, 이를 방조하는 가부장 남성과 국가에 가야 한다. 난민 남성만이 비판의 대상은 아니다. 난민 남성이 성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난민 인정을 거부하는 것은 한국 전체 남성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적 약자인 난민에게 두려움과 비난의 화살을 돌린 것일 뿐이다. 난민 남성들의 여성 권리에 대한 인식이 낮은 것이 걱정이라면 이들에게 성평등 의식 교육을 충분히 하고, 범죄 우려 지역 순찰을 강화하는 등 방법을 찾으면 된다. 또한 성범죄 예방을 위해서라면 한국 전체 남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더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성범죄 가해자의 절대다수는 이주민 남성도, 난민 남성도 아닌 한국인 남성이기 때문이다. 취업을 위해 거짓으로 들어온 난민이 있어서 이들을 수용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 또한 난민 혐오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진정한 난민과 그렇지 않은 난민을 이들의 생살여탈권을 가진 난민 수용 국가가 판단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난민을 무슨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박해는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예멘에서 교육을 많이 받고, 전문직으로 일했던 사람이라도 정치적 박해를 받을 수 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박해에 가장 취약하다. 예멘에서 이들의 경제 수준은 ‘진정한’ 난민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가짜 난민을 색출해 내는 게 아니라 보호가 필요한 이들이 보호받지 못할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는 것에 중점을 둬야 한다. 또한 한국인이 일자리를 잃는 것을 걱정하며 난민을 공격할 게 아니라 더 이상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고,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시스템을 지적해야 한다. 그 책임을 난민에게 돌리고 나가라고 하는 것은 정작 비판해야 할 강한 대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약한 난민을 공격하며 분풀이를 하는 난민 혐오일 뿐이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전세계가 우려한 것은 그의 이주민, 난민 혐오 때문이었다. 그의 혐오 발언은 지금까지도 멕시코를 비롯한 주변 국가와 마찰을 빚고,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다. 삶을 찾기 위해 한국에 온 이들을 포용하지 못하는데, 우리는 과연 트럼프 대통령 등 다른 국가들의 극우적 움직임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지금 필요한 건 ‘내로남불’이 아니라 역지사지의 자세다.
서울시 동작구 대방동·대학생 최근 한국 사회의 화두는 ‘혐오’다. 여성들이 그동안 참아왔던 성폭력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외모나 행동을 통해 여성에게 가해졌던 코르셋을 벗어 던지겠다는 선언 모두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와 맞서겠다는 말이다. 한반도 평화 상황도 마찬가지다. 최근 정상회담은 그동안 남북이 서로 적대하고 혐오했던 상황에서 벗어나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로 가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모두 혐오에 맞서 더 나은 사회로 가자는 움직임이다. 난민을 받지 말자는 주장은 혐오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난민으로 인해 성폭력 범죄가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하지만 이는 이슬람과 난민에 대한 혐오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성범죄 우려는 남성 전체에 대한 두려움에서 발생한다. 성범죄는 ‘남성’이라는 가부장적 사회의 권력자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충분히 가질 수 있는 두려움이다. 하지만 성범죄 예방을 위한 비판의 초점은 성범죄를 일으키고, 이를 방조하는 가부장 남성과 국가에 가야 한다. 난민 남성만이 비판의 대상은 아니다. 난민 남성이 성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난민 인정을 거부하는 것은 한국 전체 남성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적 약자인 난민에게 두려움과 비난의 화살을 돌린 것일 뿐이다. 난민 남성들의 여성 권리에 대한 인식이 낮은 것이 걱정이라면 이들에게 성평등 의식 교육을 충분히 하고, 범죄 우려 지역 순찰을 강화하는 등 방법을 찾으면 된다. 또한 성범죄 예방을 위해서라면 한국 전체 남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더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성범죄 가해자의 절대다수는 이주민 남성도, 난민 남성도 아닌 한국인 남성이기 때문이다. 취업을 위해 거짓으로 들어온 난민이 있어서 이들을 수용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 또한 난민 혐오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진정한 난민과 그렇지 않은 난민을 이들의 생살여탈권을 가진 난민 수용 국가가 판단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난민을 무슨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박해는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예멘에서 교육을 많이 받고, 전문직으로 일했던 사람이라도 정치적 박해를 받을 수 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박해에 가장 취약하다. 예멘에서 이들의 경제 수준은 ‘진정한’ 난민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가짜 난민을 색출해 내는 게 아니라 보호가 필요한 이들이 보호받지 못할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는 것에 중점을 둬야 한다. 또한 한국인이 일자리를 잃는 것을 걱정하며 난민을 공격할 게 아니라 더 이상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고,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시스템을 지적해야 한다. 그 책임을 난민에게 돌리고 나가라고 하는 것은 정작 비판해야 할 강한 대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약한 난민을 공격하며 분풀이를 하는 난민 혐오일 뿐이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전세계가 우려한 것은 그의 이주민, 난민 혐오 때문이었다. 그의 혐오 발언은 지금까지도 멕시코를 비롯한 주변 국가와 마찰을 빚고,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다. 삶을 찾기 위해 한국에 온 이들을 포용하지 못하는데, 우리는 과연 트럼프 대통령 등 다른 국가들의 극우적 움직임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지금 필요한 건 ‘내로남불’이 아니라 역지사지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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