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흥 경산고등학교 교사
칸트의 정언명령은 우리 삶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 가끔은 도덕성에 대한 신념이 흔들릴 때가 있다. 선선하게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할 무렵 예전에 가르쳤던 3학년 학생 ○○가 1학년 교무실 문 앞에서 종이 뭉치를 들고 나를 보며 웃는 낯을 했다. 들어오라는 손짓에 아이는 재바르게 자기소개서를 책상 앞에 내려놓았다.
언제나 그렇듯 뽀얀 종이 위에 정성스럽게 정돈된 검은 글씨들을 보면 마음은 겸허해지고 정신은 온전히 나에게로 모아진다. 그런데 이미 다른 이들에게 첨삭을 받았는지 글은 상당히 세련되어 있었다. 다 끝난 것을 왜 들고 왔는지 의심스러운 낯으로 아이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아이는 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고, 답변하더라도 형식적이었고, 글처럼 진솔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번의 오고가는 질문과 답변 속에서 아이는 당황하고 초조해하며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사실은 이전에 첨삭해준 선생님이 글을 만들어주거나 꾸민 내용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복잡한 생각들이 거칠고도 빠르게 스치면서도 지금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느냐에 대한 난처함이 커져갔다. 그런데 아이는 그렇게 이야기해주신 선생님이 여러 분이었다는 것을 한번 더 나에게 각인시켜 주고 말았다. 나는 아이에게 더 이상 글을 봐줄 게 없으니 돌아가라고 했다. 아이는 나의 굳은 얼굴을 느꼈는지 돌아서는 등 뒤로 섭섭한 기운을 내뿜으며 맥 빠진 걸음으로 터벅터벅 교무실 문께를 나섰다. 그러고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가 자기소개서를 들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교무실을 들어왔다. 혹여나 내가 귀찮아하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조바심을 그렇게 나타내었다. 아이의 긴장된 표정에서 예전과 태도가 달라져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몸가짐이 가볍지 않았고, 조숙해 보였다. 1학년 때는 매일 지각하기 일쑤였고, 자습도 성실하게 하지 않아서 매번 불러서 혼을 냈다. 아이의 어머니도 상담을 위해 학교까지 오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녀석이 나를 싫어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학년이 올라갈수록 불쑥 교무실로 찾아와 나에게 안부 인사를 건네곤 했다. 그 이유는 자기소개서에 흥미롭게 적혀 있었다.
아이는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늘어난 학습량과 긴 공부시간 때문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고, 학교 주변만을 맴돌았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자신에게) 수시로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방법과 어려움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고 했다. 그 뒤 아이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인내심을 가지고 책을 보았고, 더 나아가 친구들과 함께 교과에 관련된 동아리, 봉사 활동 등을 하며 자신을 가꾸어 나갔다. 글은 다소 거칠고 투박했지만 겸손하면서도 진솔한 마음이 와닿았다.
내가 그렇게 제출하면 된다고 하자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하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할애하여 아이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주었다. 아이는 알고 있었다는 듯 대꾸도 않고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갔다. 아이와 헤어진 뒤 잠시 먼 기억의 갈피짬을 헤집으며 당시의 순간들을 찾으려고 애썼다. 나는 호되게 꾸짖었고, 아이는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고맙게도 그때 그것을 격려나 조언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어쩌면 아이는 이미 그 이전부터 변화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각 대학에서 학생부종합전형과 관련된 면접시험이 치러진다. 과연 겸손하고 진솔한 모습은 어떠한 평가를 받을까? 매일같이 언론에서 학생부종합전형이 깜깜이 전형이고 불공정하다는 말을 접하지만 지금은 합격해야 할 아이들을 위해 칸트의 정언명령이 힘을 발휘할 수 있기를 빌어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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