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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왜냐면] ‘꽃다지’ 김호철을 위하여 / 송경동

등록 2018-10-17 17:53수정 2018-10-18 12:02

송경동

시인

얼마 전에도 형이 만들어준 노래를 부르다 그만 흐느끼고 말았습니다. 민중가요 작곡가 김호철 형의 <꽃다지>였죠. “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 작업장 언덕길에 핀 꽃다지. 나 오늘 밤 캄캄한 창살 아래 몸 뒤척일 힘조차 없어라. 진정 그리움이 무언지 사랑이 무언지 알 수 없어도 퀭한 눈 올려다본 흐린 천장에 흔들려 다시 피는 언덕길 꽃다지…” 나도 모르게 얼굴을 가린 손 사이로 뜨겁고 굵은 눈물이 솟아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형도 잘 아는 스타플렉스(파인텍) 해고노동자 홍기탁, 박준호가 서울 목동 서울에너지공사 70m 굴뚝 위에서 고공농성한 지 300일 되던 날이었죠.

촛불항쟁을 거치고도 변하지 않는 밑바닥 노동자들의 현실과 막막한 투쟁의 날들이 분했던가 봅니다. 300일이 되도록 어떤 힘도 못 된 나와 우리의 가난이 서럽고 미안했던가 봅니다. 그들은 2016년 11월부터 5개월 동안 박근혜 퇴진 광화문 캠핑촌을 함께 지킨 작은 ‘꽃다지’들이었습니다. 박근혜 탄핵이 안 되면 결사항전뿐이라고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뒤편에 조각가 최병수 형과 함께 조각물을 빙자한 철망루를 짓던 정말 순박하고 우직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시대를 바꾸고도 저 높은 고공에서 오늘도 ‘몸 뒤척일 힘조차’ 없을 그들이 서럽고 억울했던가 봅니다.

이 노래는 제 인생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형이 1980년 민주항쟁 당시 학생운동 집행부로 수배, 구속, 강제징집을 당하고 난 뒤 노동운동에 투신해 위장취업, 해고, 재구속을 당해야 했던 구로공단. ‘닭똥집이 벌벌벌, 닭다리 덜덜덜, 잔업철야 지친 몸 소주로 달래’던 <포장마차>를 만들고, ‘잘린 손가락 묻고 오는 밤 시린 눈물 흘리던 밤. 피 묻은 작업복에 지나간 내 청춘 이리도 서럽구나’라고 <잘린 손가락>을 노래하던 구로공단이 제게도 이십수년 청춘을 묻은 제2의 고향이었습니다.

거기 어느 바퀴벌레 천국이던 삼십에 오만원짜리 닭장집 지하방이 저의 처음이었죠. 엉덩이가 끼는 침침한 부엌에서 혼자 설운 빨래를 하거나 가난한 밥을 지을 때마다, 모임을 마친 새벽 가리봉 구종점 언덕길을 오를 때마다 혼자 흥얼거렸던 <꽃다지>였습니다. 이젠 ‘진정 그리움이 무언지, 사랑이 무언지’ 알 수 있게 되었는지 두렵고 막막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제 인생의 모포와 같던 노래. 이제 와 처음으로 형에게 그런 삶의 노래를 저에게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드립니다.

돌아보면 그 노래뿐이겠습니까. ‘가세 가세 내 조국 해방의 땅… 간악한 독점재벌 폭력과 맞서다 쓰러진 동지여. 순박한 소망과 뜨거운 동지애. 오직 그 하나로 맞섰던 열사여… 죽음을 딛고 노동해방 그날에 꼭 살리라’던 <끝내 살리라> 역시 제 인생의 지침이자 강령과도 같던 노래였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불멸의 노래들인 <파업가> <단결투쟁가> <단순조립공> <진짜 노동자> <전노협 진군가> <희망의 노래> <들불의 노래> <딸들아 일어나라> <장애해방가> <민중의 노래> <민중권력쟁취가>, 가장 근래 촛불광장 모두의 노래가 되었던 <박그네를 감옥으로>까지, 작곡가인 형이 만들어 준 수많은 노래가 지난 30여년 내 노래, 우리의 노래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요. 그렇게 우리는 형이 만들어 준 수많은 노래와 그 노래를 현장에서 들려주던 가난하지만 당당했던 ‘민중가수’들에게 기대 험한 세월을 건너올 수 있었죠.

그런 형이 아프고, 그 길을 함께 걸어온 형의 인생 동반자 황현 동지가 아프다는 슬픈 소식을 듣고 70여명의 노래하는 벗들이 모여 형의 노래인생 처음이었던 <파업가> 30주년 헌정음반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미 1천여명의 공동 제작자들이 우리 모두에게 소중했던 시간을 기억하자고 나서고 있습니다. 그런 세월을 거치고도 서민 가계부채 1500조원, 비정규직 1100만명 시대, 반대로 100대 재벌 사내유보금은 1천조원을 넘는 이 불의한 시대를 다시 돌아보고 용서하지 말자는 뜻이기도 하겠죠.

그러니 우리 모두 다시 기운 내요. ‘으스럼질 때엔 반성하는 민주투사, 동지여, 하루에 무용담을 말’하자던 형을 따라 우리 모두는 늘 흔들려도 ‘다시 피는 언덕길 꽃다지’였고, ‘의리와 깡다구로 뭉쳐진… 진짜 노동자’였고, 빈민의 벗이었고, 열사들의 분신이었고, 장애해방의 투사였습니다. 형과 형의 동료 가수들이 우리 모두의 벗이었고, 자랑이었습니다.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햇볕 한 줌 될 수 있다면’ 그 마음 하나로 우리 모두를 위해 노래해 준 형과 형의 친구들에게 오늘 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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