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진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도로 등 교통 인프라는 지난 사반세기 동안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비포장도로가 많았던 30년 전과 비교하면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양적 성장에는 1994년 제정된 교통시설특별회계의 도움이 컸다. 그동안 자동차 기름을 넣을 때마다 냈던 세금이 그 구실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로 등 인프라 확충이 충분히 이루어진 만큼 교통시설특별회계의 수명이 다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경기 활성화 차원에서 한시적으로 유류세를 낮추는 조처도 단행됐다. 일부에서는 교통환경 개선을 위해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이제 교통시설특별회계는 우선 교통 인프라의 안전을 개선하는 데 쓸 것을 제안한다. 그동안 도로의 양적인 팽창에만 썼다면 이젠 운전자가 실수하더라도 목숨을 잃지 않도록 도로 시스템을 안전하게 정비하는 데 써야 한다.
흔히 교통안전은 운전자나 보행자가 주의할 문제이지, 돈을 들여 개선할 정책과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 돈을 쓸 곳은 많다. 지난 30년간 사고 잦은 곳 개선사업을 추진해왔지만 아직도 도시마다 100곳 이상이 방치되고 있다. 도로를 관리하는 지방자치단체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고 잦은 곳 개선사업의 예산을 비교하면 국도는 ㎞당 250만원을 쓰고 지방도는 3만원을 쓰고 있다. 예산 투자의 차이는 안전 수준의 차이로 이어진다. 지난 10여년 동안 국도의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57% 감소했지만 지방도의 사망자 수 감소폭은 36% 수준이다.
그런데도 예산 당국은 지자체 도로의 교통안전은 지방 사무이므로 중앙정부 예산을 투입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교통시설특별회계는 국도나 고속도로 이용자가 낸 세원만으로 조성되지 않았다. 오히려 광역특별시도 등 지자체 도로를 이용한 사람들이 더 많은 세금을 냈다. 또한 특별회계 가운데 일부는 이미 지자체의 대중교통 개선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안전을 위해 쓸 의지만 있다면 법령을 개정하여 지원하면 된다. 미국, 일본, 영국 등 교통안전 선진국에도 지자체의 교통안전 예산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아무리 선진국이라 해도 지자체 스스로 교통안전 예산을 충분히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이렇게 중앙정부가 지자체 교통안전 예산을 지원하면 지자체에 교통안전 관련 조직이 만들어지고 안전사업도 다양화될 수 있다. 서울, 인천, 대구, 강원, 전남을 제외한 나머지 12개 광역자치단체는 교통안전 전담조직이 없을 만큼 우리나라 지자체의 교통안전 의지는 약하다. 만약 예산이 생긴다면 새로운 조직도 만들고 인력도 뽑고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는 안전사업도 벌일 수 있다. 교통시설특별회계가 지자체 교통안전 개선에 최우선으로 쓰여야 하는 이유다.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의 77%가 지자체 관할 도로에서 발생했다. 이는 지자체 도로에 대한 예산 지원 없이 새 정부가 공약한 대로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2천명으로 줄이는 것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예산 없이 교통안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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