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 미얀마 사람 마웅저씨가 민주화 운동으로 우리나라에 정치적 망명을 왔다. 민주화 이후에 발전한 한국의 시민운동이 미래의 미얀마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파트타임이지만 한국의 시민단체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 시절 마웅저씨는 합법적 신분이 아니었다. ‘난민’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는 난민법은 없었지만 유엔난민협약에는 가입되어 있었다. 정치적이든 다른 이유든, 난민으로 우리를 찾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법무법인 공감의 도움으로 국가를 상대로 난민지위 인정 소송을 제기했고, 그 소송에서 이겨 마웅저씨가 공식적으로 난민지위를 인정받는 과정을 함께했었다. 그는 지금 아웅산 수치가 정치적으로 재기한 뒤,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 청소년을 돕는 시민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기억이 있어서인지 한때는 난민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로힝야족을 난민으로 만든 것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런 궁금증이 지난 8월, 구호단체인 사단법인 에이팟코리아의 제안으로 방글라데시 쿠투팔롱에 자리잡은 로힝야 난민촌에 다녀오게 했다. 미얀마 군부가 자행한 대학살로 난민촌에는 100만명이 넘는 로힝야족이 모여 살고 있다. 특히 여성들에게 가해진 가혹한 폭력의 보고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영국의 식민지 시절 로힝야족의 과거사 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영국 식민지 당시 로힝야족의 일부가 악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대학살을 벌이는 반인권적 행동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황무지에 임시텐트로 다닥다닥 조성된 로힝야 난민촌에는 상하수도 시설이 없다. 본래 이곳은 농사지을 만한 땅이나 우물을 팔 만한 지하수가 없어 방글라데시 사람들조차 살지 않던 척박한 땅이기도 했다. 현재 난민촌에는 캠프 31곳이 마련되어 있는데, 지난해엔 신생아 8만6천명이 태어났다. 난민촌 안의 감염과 질병은 만연되어 있고, 전염병은 일상적이다.
캠프 14, 15에 여성과 영유아를 위한 전문클리닉을 운영 중인 에이팟코리아도 하루 평균 500명 가까운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살아온 로힝야족 여성들은 여성 의사가 아니면 진료를 보기가 힘들다. 클리닉에는 다행히 어렵사리 구한 여성 의사가 있었다. 전체 환자의 68%가 여성이고, 15살 이하 환자도 33% 정도에 이르니, 이 시설의 활동은 로힝야 난민촌 안에서도 약자들을 위해 운영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난민촌이 형성된 지 2년이 지나면서, 초기와 달리 여러 엔지오가 철수하는 상황도 감지된다. 캠프 15에도 클리닉 8곳이 운영 중이었지만, 현재는 2곳만 남았다. 남아 있는 클리닉으로 환자들이 몰리면서 남아 있는 엔지오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고 있다. 로힝야족이 이곳에 정착하든 미얀마로 되돌아가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일정 수준 이상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이슈 중 하나다.
로힝야 난민촌으로 가는 길목의 방글라데시 농촌 풍경은 가난하기 그지없다. 자유의 제한과 보장되지 않는 미래라는 근원적인 절망이 있는 난민들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인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돕고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가 이런 상황을 외면해서는 안 될 일이다.
잠시 다녀온 경험으로 난민촌의 상태를 다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기부자들의 후원이 제대로 쓰인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구호가 제공되는 과정을 기록해야 하는 구호단체들은 의도치 않게 난민촌 사람들의 자존감에 상처를 주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구호물품을 받아가는 난민촌 사람들의 어색한 몸짓과 눈빛은 잊히지 않는다. 작지만 구호와 관련된 과정이 그들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게 세심하게 기획되길 기대해 본다.
이제 로힝야 난민들의 삶은 다시 나와는 먼 일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아니, 또 잊고 살 가능성이 큰 게 현실이기도 하다. 임시텐트 안에 나와 같은 무게의 우주를 가진 사람들의 삶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 그저 조금만 마음을 보태면 그들의 삶도 그만큼 나아진다는 것도.
하승창
연세대학교 객원교수·전 청와대 사회혁신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