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규 ㅣ 시인
멀리 사는 벗에게서 아주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개밥바라기별 옆에 지는 그믐달이 시리다고, 네 생각이 났다고. 먼저 전화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나도 얼마 전 출근길에 마주친 새벽별이 첫사랑과 보던 별자리 이상으로 아름다웠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안다, 그리워도 무소식에 기대어 살다가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나면 거의 동시에 서로를 떠올린다는 것을. 코로나19가 퍼질수록 우리의 일상은 비정상이 되어갔다. 가짜뉴스와 인포데믹, 공포가 퍼질수록 일이 많아진 나는 출근 시간이 어둑새벽으로 앞당겨졌다, 친구는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학원을 잠정 휴업했다. 어찌 잘, 정말 잘, 지내는지 걱정되었다. 친구는 딴소리를 했다. 자꾸 읽을수록 좋은 텍스트가 있더라, 오래전 이십대 때 너와 같이 읽은 시집들과 박상륭, G. 바슐라르가 그렇다고.
친구의 말대로 나도 짬을 내 그 책들에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두께 얇은 막스 피카르트도. 그때보다 더 깊고 넓은 행간에 침묵이 번져왔다. 침묵 속에 있다 보니 어느새 봄은 또 창가에 와 있었으니 정말 ‘침묵으로부터 오는 봄’이었다. 텍스트는 변하지 않은 채 새로운 상상력과 다스함을 선사한다. 그처럼 오염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시와 달빛과 별빛은, 또 단 한번뿐인, 그래서 더 간절하게 당신의 시선을 기다리는 올해의 봄빛은 감염되지 않는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바이러스는 훼방할 수 없다, 그 그리움과 열망은 기침보다 참담하고 고열보다 뜨겁다. 시적 순간은 이렇게 그리움의 옷을 입고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아무리 바이러스가 무섭고, 지나치는 익명의 호흡과 흔적이 두려운 일상이라도, 이유 없이 이 봄바람이 아리고 떨어지는 목련에 울컥했다면 그게 시적 순간이다. 그때는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더 그리운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해보자, 꽃잎처럼 순백의 그리움을 담고, 시구절 하나도 들려주며. 심리적 거리 좁히기는 이토록 어렵지 않고 평안하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처박혀 지루한 일상에 시집을 선물해보는 것은 어떤지. 시집 사는 데 돈이 아깝다면 먼지 자욱이 구석에 박힌 책을 꺼내도 좋다. 이 비상시국에 무슨 시 타령, 꽃 타령이냐고? 시가 밥 먹여주느냐고? 밥을 최우선으로 살다가도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시를 내세운다. 출사표를 던질 때, 사의를 표할 때, 사랑에 빠질 때, 버림받고 캄캄할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사람들은 시 구절을, 시의 순간을 떠올린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당신의 손이 참으로 차갑다고 읊조리는 것처럼, 신종 폐렴의 공포가 이어져도 시적 순간은 늘 있다. 지나치는 바람처럼, 고치지 않아도 되는 버릇처럼.
결단코 감염시킬 수 없는 것들이 있다면 바이러스보다 더 악착같은 것들도 있다. 읽다 보면 진실을 가장한 채 교묘한 음모를 버무린 글들, 무엇을 왜곡했는지도 모를 만큼 앞뒤가 맞지 않고 선동만 남은 기사들, 가짜뉴스를 던져두고 미안해하지 않는 이들에게 묻는다. 둥둥 뜬 허상으로 삶과 일상을 파괴하는 글이 바이러스와 다른 게 무엇인가. 억울한 피해자인 감염자들조차 자책하며 죄의식을 갖는 판국에 염치는 어디에 버렸는가. (동맹을 맺고 사투를 벌이는 대구와 광주 의료진에게, 간절하게 보고 싶은 어린 자식을 집에 두고도 들어갈 수 없는 간호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감염시키는 데만 열 올리는 기사는 손씻기 눈씻기로도 사라지지 않는다. 펜과 자판은 바이러스를 옮기는 수단이 아니다(아무리 선거가 코앞이라도 그렇지). 그들에게도 부끄럽게 피어나 순식간에 지는 꽃잎과 시를 선물하고 싶다. 생각난 듯, 문득 창밖에 만연한 물빛과 봄빛 행간으로 스며 나오는 거짓 없는 침묵도, 1초만이라도 그 침묵 속에 깊게 머문다면 들을 수 있는 찬란한 이 계절의 선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