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영 ㅣ 환경철학 연구자·<숲의 즐거움> 저자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의료 지원을 요청한 지난 3월24일은 기억할 만한 날이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는 열풍에 쐐기를 박았기 때문이다. 개항 이래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일로 미국의 원조 요청을 받기는 사실상 이번이 최초라며, 어떤 이는 목울대를 세우기도 했다. 두 정상 간 통화가 떠들썩하게 보도된 날, 기자들은 코로나바이러스 진단키트 판매와 지원을 요청한 국가들을 열거하느라 부심했다. 대서양 양편마저 ‘코로나 패닉’ 상태에 빠진 아득한 상황에서 한국은 드디어 명(名)과 실(實)이 상부한 선진국으로 올라선 것만 같고, 그토록 우리를 옥죄던 서양 콤플렉스도 이제는 만기를 다한 것만 같다.
한국의 코로나19 대응 방식이 세계의 귀감이라는 <뉴욕 타임스>의 찬사마저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사회에는 대서양 양편의 사회들과 비교해볼 때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 한마디로 그것은 ‘왜’를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는 것이다. 감염병 환자의 진단과 격리, 치료에 그 어떤 국가보다 높은 효율성을 보여주고 있고 향후의 감염병 재확산 가능성까지도 논의석상에 올려놓고 있지만, 도대체 ‘왜’ 우리가 이런 생난리를 겪어야 하는가라는 결정적인 질문에만은 생각의 문을 닫으니 하는 소리다. 원인을 깊이 따지지 않고 눈앞의 문제를 처리하는 데만 급급한 이런 근시안적 일 처리는 향후 유사 사태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며, 이 난리가 지나간 이후의 시대를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에 관한 원시안적 논의의 빈곤과 일맥일 것이다.
대동소이한 현상을 우리는 ‘겨울 가뭄’ 관련 언론 보도에서 발견한다.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에 놀란 모두를 위해 기상 전문가들이 방송에 초대되었다. 하지만 정작 ‘왜’에 관한 의미 있는 토론은 미진하기만 했다. 일부 기상 전문가는 “결국엔 기후변화 문제”라는 이야기를 용기 있게 꺼냈지만, 기이하게도 대화는 거기에서 돌연 중단되었다. 상영되기 시작하자마자 “The End”(끝)라는 자막이 올라오는 영화도 있었던가. 온실가스 배출과 ‘겨울의 붕괴’라는 동궤의 문제를 진지하게 논하는 공론장은 없었다.
코로나19 난리 통 속에서 속칭 엔(n)번방 사건이 터져 나왔다. 이 경우에도 원인을 따져보자는 목소리가 미미함을 보고, 나는 더는 놀라지 않는다. 처벌과 양형에 관한 분노 어린 말들이 들끓는 속에서, 왜 그런 괴물들이 이 사회 ‘내부’에서 탄생했는지, 그 곡절을 파고드는 담론은 태부족하기만 하다. ‘어떻게’가 시급한 상황이므로 ‘왜’ 따위는 ‘잠시’ 물러나주셔야 하는 걸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왜’를 이야기하기 시작할까? 그러나 19년형 코로나바이러스 환자가 중국에서 나온 지 이미 3개월이 지났고, 2019년의 겨울 가뭄이 2018년 겨울 가뭄에 이은 두번째 겨울 가뭄이었음에도 아직 ‘왜’가 대두되지 않는 것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사실, ‘어떻게’에 능하지만 ‘왜’에는 형편없는 것은 서양 의학이다. 이 의학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치료함에 능하되, 왜 병이 발생한 것인지에 관한 질문 앞에서는 벙어리가 된다. 그러나 인체의 병이든 사회의 병이든, 처방만큼이나 예방이 중요하지 않을까? 똑똑한 의술과 정의로운 법치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나,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멀리 바라보고 대비하는 지혜와 행동이 다급한 시절이 아닐까? 한 체제가 쇠망하고 있는 대변동의 시국에, 세계의 병원에 시체가 즐비한 대참사의 판국에 선진국 타령은 한가롭고 남세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