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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펫로스, ‘고작'이라 말하지 않기를 / 정은주

등록 2020-04-30 17:52수정 2020-05-01 02:38

정은주 ㅣ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 웰다잉 강사

올해 초 예비중학생들과 웰다잉 토론수업을 했다. 펫로스 주제를 위해 택한 <망가진 정원>이라는 그림책은, 개의 죽음 이후 주인공이 겪은 일들을 단순한 언어와 아름다운 그림 속에 펼쳐 놓았다. 학생들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마지막 대목을 꼽았다. ‘다시 행복하고 싶어서’, ‘새롭게 희망을 주는 것 같아서’, ‘다시 초심을 찾고 싶어서’ 등의 이유였다. 그러나 내게 가장 와닿은 것은 ‘친구가 없는 정원이 무섭도록 낯설었다’는 대목이다. 개와 함께 멋지게 가꾸었던 정원을, 닥치는 대로 망가뜨려 가장 쓸쓸한 곳으로 만든 주인공을 보여주며 작가는 섣부른 치유를 말하지 않았다. ‘망가진 정원’을 제목으로 삼은 것도 펫로스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애도의 시간은 충분히 길어야 한다.

나의 아들에게 선명한 추억을 남겨준 친척집 개 ‘마루’가 얼마 전 숨졌다. 나의 오빠는 뉴질랜드로 이민 간 초기, 골든리트리버 종인 마루를 키우기 시작했다. 12년 반 동안 큰 사랑을 받았던 마루는 오빠의 생일에 가족 품에서 눈을 감았다. 갑자기 식욕이 떨어진 개를 데리고 병원에 갔을 땐 이미 림프샘(임파선)암이 온몸에 퍼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진단을 받고 불과 며칠 만에 숨지기까지 마루는 평소와 같은 품위를 잃지 않고 담담하게 그 시간을 견디었다. 마루가 숨지기 전날은 그간 가물었던 오클랜드에 세차게 비가 내렸다. 아침이 되어 어떤 음식도 삼키지 못하는 마루를 보며 오빠는 텃밭 옆, 마루가 늘 가족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곳에 깊이 땅을 팠다. 중국의 직장에서 근무 중인 큰조카가 영상통화로 애타게 이름을 불렀을 때 마루는 마지막 힘을 다해 몇 초간 또렷이 눈을 맞춘 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유독 참을성 많고 사람을 좋아했던 마루, 미운 짓 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더 애틋했던 마루는 영원한 가족으로 모두의 가슴에 남았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고통을 참으며 식구들 모습이 다 보일 때까지 기다려준 마루를 생각하면 나도 명치끝이 아려온다. 오빠 가족은 마루가 좋아했던 음식을 정성껏 차려 집에서 소박하게 천도재를 치러주었다. 작은조카는 마루의 목줄과 몇 가지 소지품을 챙겨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한다.

반려동물 인구 천만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펫로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많은 이들이 동물을 무생물처럼 간주하기에, 고통 속에 있는 반려인들에게 가혹한 조언을 하곤 한다. ‘고작 동물 한 마리인데 뭘 그리 슬퍼해요? 같은 종으로 빨리 한 마리 데려와요.’ ‘고작’이라는 한마디에 무너지는 가슴을 과연 그들은 알까? 반려동물이 보이는 헌신은 사람과는 다른 고유함을 갖고 있다. 적어도 죽음을 맞는 태도에 있어 동물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진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반려동물을 집에 데려오는 순간 우리는 순수하고 일관된 사랑을 누림과 동시에, 얼마를 살든 너무 이르게 느껴질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해야 한다. 사람보다 훨씬 죽음에 대한 저항이 덜한 반려동물을 보며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상실과 치유에 대해 다른 차원의 배움을 얻는다.

예전에 오빠 집을 방문했을 때 늘 울타리 너머를 쳐다보며 조용히 앉아 있던 마루의 모습은 마치 현자인 듯 신비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아들과 나는 마루와 찍은 사진을 모아 글과 함께 포토북을 만들었다. 제목은 <마루는 언제나>. 많은 것을 남기고 떠난 마루는 우리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 있을 것이다. 오빠 가족에게 가슴으로부터 깊은 위로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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