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호 ㅣ 인하공업전문대 교수
지난해 12월 제주도에서 귤 한 상자가 집으로 배달돼 왔다. 상자 속엔 먹음직한 귤과 함께 “아빠의 자리를 찾게 해줘서 고맙다”는 문구의 카드가 있었다. 보낸 사람은 20년 지기 친구로, 컴퓨터 관련 중소업체를 운영하는 일명 사장님이다.
나는 몇년 전부터 연말이 되면 이 친구가 운영하는 회사 연말모임에 참석한다. 직원들의 노고에 서로 감사하고 송년회를 즐기는 자리에서 내겐 강의가 임무로 맡겨졌다. 공짜 밥은 없다는 친구의 반협박으로 지난해까지 여덟번 강의를 했다. 주로 여가, 여행, 휴가 등이 주제였다. 2년 전 ‘일 그리고 휴가’에 관해 강의하면서 직원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뭔지를 묻자 ‘마음 편하게 가족들과 휴가 가는 것’이란 답이 많았다. 사장인 친구는 놀라면서 직원들의 휴가와 쉼, 가족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물론 휴가를 못 가게 한 건 아니지만, 아무개 과장은 10년을 근무하면서 명절을 제외하고 4일 넘게 쉬어본 기억이 없다고 할 정도니. 우리나라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공통된 생활상이다.
나는 직원들과 휴가에 대한 공감대를 먼저 형성하고 근로자휴가지원사업에 참여할 것을 당부했다. 다행히 2019년 선정돼 직원 20여명 모두 지원을 받게 되었다. 친구는 정부 지원보다도 직원들과의 유대감이 강화되고 회사 분위기도 좋아진 것에 흡족해했다. 사장인 자신이 솔선수범해 제주도 10일 휴가를 다녀왔는데, 막내아들이 “우리 가족에 아빠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이제야 채워진 것 같다”며 좋아했다고 했다. 내게 보내온 귤은 바로 휴가 중에 보낸 것이었다.
회사에선 작은 변화가 시작됐다. 먼저 휴가신청서에 결재란이 없어졌다. 휴가 10일 전 휴가신청서만 제출하면 된다. 또한 1주일 이상 휴가자에게는 휴가비를 추가로 지원했으며, 연말모임 직원 선물은 항공권, 숙박권, 여행상품권으로 바뀌었다.
얼마 전 한 방송사 심야토론에서 ‘선진국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전문가들이 의견을 나누는 중 ‘삶의 질’ ‘행복지수’ ‘일과 삶의 균형’ 등의 문제가 제기됐다. 한국은 많은 부문에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고 있지만 근로자의 삶은 여전히 국제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최근 노동환경 개선, 워라밸 확산, 개인의 삶 중시, 기업의 인식 향상 등으로 휴가에 대한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지만 중소기업 근로자들은 여전히 쉬는 게 부담스럽다. 다수 선진국에서는 이미 근로자 휴가문화를 개인의 몫만이 아니라 정부와 기업이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로 인식하고 사회적으로 제도화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2018년부터 근로자휴가지원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올해는 기존 중소기업, 소상공인에서 중견기업, 비영리민간단체, 사회복지법인·시설 근로자까지 대상이 확대되면서 12만명이 지원을 받게 된다. 이 사업은 기업과 근로자의 휴가문화 개선뿐 아니라 지역경제 활성화 등에 기여하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포스트 코로나 대책도 논의되고 있겠지만, 직접 지역에 찾아가 소비하는 것만큼 내수 회복 및 경기 활성화에 좋은 대책도 드물다.
생활방역으로 접어들면서 침체된 경제도 서서히 활력을 찾을 거란 조심스러운 기대도 했으나 다시금 확진자가 늘고 있어 안타깝다. 코로나19가 생활경제를 위축시킨 영향이 막대해 올해 휴가지원사업 참여도 예년 같지 않다고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이 고난의 길에서, 정말 힘든 일이겠지만 국민 건강과 경제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도록 다 같이 성숙된 시민의식과 지혜를 발휘해나가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