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혜란 ㅣ 에너지시민연대 사무총장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빌려 보자면 현대는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유지되는 소비사회다. 상품은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용가치’와 영구히 만족되지 않는 ‘교환가치’를 가지는데, 상품 소비는 이 두 가치의 향유라고 할 수 있겠다. 소비를 통한 욕구 충족은 어려운데 이는 교환가치에 투영된 인간의 욕망이 부단히 변화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베인 컴퍼니는 매슬로 욕구 5단계 피라미드에서 영감을 얻어 소비자 상품소비 분석 등을 통해 4단계 ‘가치 피라미드’를 발표한 바 있다. 소비자가 상품을 소비할 때 제일 먼저 기능적 가치를 기대하고, 다음으로 웰빙이나 재미 등 정서적 가치를 충족하기 위해 소비한다. 그리고 생활 자체를 변화시키는 가치, 다시 말해 자아실현에 보탬이 되고 삶의 동기와 희망을 주는 상품을 찾는다. 마지막으로 소비자 개인을 초월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치를 가지는 상품을 소비한다. 결국 소비자는 소비 가치를 개인적 차원에서 추구하는 편리한 기능에서 정서 및 생활 변화를 이끌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사회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가지는 상품을 소비할 때 진정한 가치와 극대화된 만족감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전력은 유통과 소비 인프라의 발달로 사용 편의성이 커서 현대 에너지 상품 가운데 가장 폭넓게 사용된다. 일차원적으로 보면 전력은 전기전자제품을 작동시키는 동력일 뿐 빛이나 소리, 영상, 이동성, 가동성을 구현하는 기기나 물성 그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전력이 지닌 정서적 가치, 생활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영향력은 그러한 기기들 뒤에 은닉되기 쉽다. 그러나 기후변화, 미세먼지 등 환경과 사회적 현상이 전력 상품에 내재된 문제를 드러내는 시대가 됐다. 사용 단계에서의 전력은 동일한 기능성, 사용가치를 가지지만, 생산을 위한 에너지원이 가진 문제가 가치 구조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에 전력 가치의 재구조화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동안은 ‘얼마나 값싸고, 정전 없이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가’가 전력 가치의 핵심이었지만, 오늘날은 ‘얼마나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안전하게 생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오랫동안 원자력과 석탄화력을 주원료로 만들어진 전력의 가치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전력 상품에 달라진 환경, 안전 가치를 추가적으로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소비자에게 기후이상과 미세먼지를 감내하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것인가. 물론 지금의 재생에너지 전력은 불안정한 생산과 비싼 가격 등으로 전적으로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환경성과 지속가능한 가치는 소비자 인식 조사에서 높은 수용성을 보인다. 재생에너지가 주력 전력 상품이 될 가능성을 높이는 기술적 진보와 사회적 조건도 변화하고 있다. 불안전한 변동성과 계통연계 문제는 에너지저장장치(ESS)로, 높은 생산가격은 기술 개발에 따른 투자비 하락과 녹색가치 자체를 소비하고자 하는 기업과 개인 소비자들의 구매로 해결될 것이다.
결국 매력적인 상품으로서의 전력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탈탄소여야 하는 가치 △미래세대에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되는 지속가능성과 세대윤리의 가치 △장거리 수송에 의존하는 화석연료 위주의 전력으로 가져오는 지역별 갈등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는 공정성의 가치 △새로운 일자리를 다수 만들 수 있는 더 유능한 경제적 부가가치를 내재해야 한다는 변화된 시대의 요구를 반영해야 한다. 정부와 전력공급자들은 바로 이러한 소비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상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혁신해야 할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값싸고, 정전 없어 안정적이라는 슬로건은 더 이상 소비자에게 통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지금 세대와 미래세대를 위한 녹색과 안전에 대한 가치에 따르는 온당한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충분히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개인의 편리’가 아닌 ‘사회의 편리’로 전환하기에는 긴 호흡이 필요하며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것은 에너지 전환으로 가는 경로 속에 있다. 먼 길에는 동행이 필요하다. 시민사회와 동행하려는 정책 의지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