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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변호사의 나라 / 이경수

등록 2020-09-28 15:59수정 2020-09-29 14:19

이경수 ㅣ 법조문턱낮추기실천연대 대표

과거시험 경우 급제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었다. 신사임당의 남편이었던 이원수는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겨우 급제하여 관직을 받았다. 그는 60년을 살았으니 수험생활보다 짧은 벼슬이었다. 벼슬하고 싶은 사람은 많고 벼슬자리는 부족하니 시험으로 줄을 세우는 것이 일견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원수가 얻은 벼슬인 수운판관(세곡 등의 한강 운송 관련 업무)이 그가 평생을 공부한 유학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대한민국의 공무원시험은 과거시험과 비슷하다. 공무원시험뿐만이 아니라, 사기업 입사시험도 다르지 않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변별력을 위해 이번 순경 임용시험처럼 점점 더 구석진 부분을 문제로 출제한다. 누구도 그걸 알아야 공무원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성적순으로 뽑는다는 것이 공정해 보이기 때문에, 저런 일생 쓸모없는 지식을 묻는 것조차 수험생들에게 받아들여진다. 대입도 마찬가지다. 대학의 입학은 오로지 성적순이어야 승복한다. 각종 고시, 자격시험도 마찬가지다.

수험이 길고 힘들기에 그 보상으로 고시 합격자는 스스로를 타인과 격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줄을 세우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니 그들은 평생 쓸모없을 오로지 수험만을 위한 지식을 쌓는 것을 당연시한다.

합격자에게 별다른 권리나 권한이 부여되지 않는다면, 언젠가 저런 인식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사람은 합격자다. 그들은 사회에 권리를 요구한다. 예를 들자면 의사와 변호사 집단의 경우 “최소한 이 정도는 벌어야지”라는 적정 소득이 그들의 권리다. 그래서 그들은 합격자 수를 통제하거나, 입학생 수를 통제한다. 그들의 “소소한 권리”는 의사와 변호사가 되는 길을 험난하게 만들고, 그 길을 돌파한 사람들이 또다시 “소소한 권리”를 주장하도록 만든다. 그들의 “소소한 권리”들에 피해를 입는 것은 그들과는 ‘계급’이 다른 시민들뿐이다.

의사 집단은 환자를 인질로 잡고 권리를 주장하는 반면, 인질로 잡을 환자가 없는 변호사는 어떤가? 국회의원은 사회 각 분야의 인구 비례적으로 자리하고 있어야 할 텐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직업군이 법조인이다. 인구는 5천만이고 변호사는 3만명 정도니 비율상 300명 중 1명 정도면 될 법한데, 그것의 40배가 넘는다. 그러니 국회는 변호사에게 불리한 법을 거의 만들지 않는다. 이들은 교육계가 줄세우기의 단점을 수없이 나열해도 제도를 손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를 손보는 순간 자신들의 “소소한 권리”는 더 이상 정당화되지 않으니 바꾸기가 싫다. 심지어 만들어진 법률의 위헌 여부를 판단하는 것도 변호사들이니 변호사의, 변호사에 의한, 변호사를 위한 국회, 고시국가 대한민국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변호사의 나라’다.

지난 9월24일 변호사시험 응시제한과 관련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었다. 변호사 선발 과정의 줄세우기가 사라질 수 있을지 가늠할 그 결정문의 다음 두 문장이 눈에 띈다.

“청구인들은 의사·약사 등 다른 자격시험과 변호사시험을 비교하면서 평등권을 침해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 자격시험들은 응시자에게 요구하는 능력과 이를 평가하는 방식이 변호사시험과 다르고, 변호사시험과 달리 장기간 시험 준비로 인한 인력 낭비 문제의 심각성, 전문대학원에서의 교육과 자격시험 간 연계의 중요성 등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지 않다.”

“법학전문대학원 입학자를 모두 변호사시험에 합격하도록 한다면 법학 교육의 충실성을 담보하기 어렵고, 변호사 자격제도에 대한 신뢰가 저하될 수 있다.”

사실상 입학생의 모두가 의사가 되는데도 의대 교육의 충실성과 의사 자격제도의 신뢰가 저하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의사·약사 등 다른 자격시험에서는 장기간 시험 준비로 인한 인력 낭비 문제, 교육과 시험 간 연계의 중요성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지 그들이 정말 몰라서 저런 결정을 했을까? 아닐 것이다. 헌법재판관님들께서 줄세우기의 손을 들어 밥그릇을 지키셨을 뿐.

우리 사회의 줄세워 선발하기 만능주의가 사라지고 그 사회적 폐단을 해소하는 날이 어서 오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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