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문정 ㅣ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20대 때 야무진 꿈을 꿨다. ‘수출’이란 표현을 쓸 정도로 심각한 해외입양 현실이 안타까워 나라도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혼 전 합의해 한 명은 낳고 한 명은 입양하자 했다. 그러나 나는 입양이 아니라 ‘낙태’를 했다. 신혼집 경매, 배우자의 교통사고와 심각한 후유증, 늘어나는 빚.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사고 와중의 임신. 한 돌 남짓한 아이와 막막한 생계. 태어날 아이를 과연 제대로 양육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결국 넷이 같이 죽는 것보다 셋이라도 살아야겠다고 결정했다.
피임·임신·출산·양육·교육, 그 모든 과정은 상상과는 다른 현실이다. 콘돔 사용하면 된다는 얕은 정보 외에 성교육이 부재한 시대, 계획에 없는 임신을 피하는 것은 어려웠다. 사용법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하고 불량 콘돔을 탓했다. 돌봄이 절실한 두 사람을 함께 돌봐주고 경제적 어려움을 나눠줄 사람도, 정책도 없었다. 오로지 개인의 힘으로 헤쳐 나가야 했다.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성장시키는 과정, 그 과정을 공동양육자와 합의하고 보조를 맞추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고민도, 제대로 된 가르침도 없이 순간순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스스로 겪어내야 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피임·임신·출산·양육·교육은 개인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개인을 탓하는 것은 엄청난 폭력이고 차별이라는 것을. ‘입양’이라는 꿈이 얼마나 무지한 치기였는지, 아프게 깨달았다. 이 모든 경험은 나를 여성운동으로 이끌었다. 여성의 경험을 삭제한 사회의 폭력성, 그 때문에 증가하는 여성의 ‘취약성’, ‘취약성’의 구조화와 차별의 심화…. 나의 절망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지 않기를 바랐고, 회복 불가능한 혹은 지속을 담보할 수 없는 사회가 될까 두려웠다.
임신은 자궁을 가진 여성에게는 평생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100% 완벽한 피임법은 없기 때문에 개인이 아무리 철저히 대비해도 실패할 수 있다. 사람의 몸이 그렇다. 실패한 피임의 책임을 경제·사회·문화·정책적 뒷받침 없이 개인에게만 강제할 수 없다. 온 일생이 걸린 출산·양육·교육에 대한 책무는 강제한다고 강제될 일도 아니다.
개인의 의지나 노력으로 불가능한 조건을 이유로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 일에 형벌권을 들이대고 그 책임을 여성에게만 부과하는 것은 국가에 의한 차별이자 폭력이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2011년과 2018년 두 차례나 한국 정부에 ‘낙태의 비범죄화, 처벌조항 삭제, 임신중단 전후 안전하고 접근 가능한 양질의 의료서비스와 돌봄서비스 제공’을 권고했다.
생명의 가치는 누구보다 여성운동이 가장 깊이 고민하고 실천한 영역이다. 일과 생활의 균형과 육아·돌봄의 남성 참여 확대, 출산·육아휴직 확대, 안전·평등한 일터 만들기, 영유아·방과후 보육 시설 확충, 한부모에 대한 인식 개선 및 양육환경 조성, 양육비 이행 등 지원정책 마련, 안전하고 실질적인 성교육, 공교육 제도 개선 등 여성운동은 누구보다 가장 깊이, 태어날 자녀의 미래의 삶까지 숙고하는 주체는 여성이라는 신뢰 위에서 실질적인 피임·임신·출산·양육·교육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개인이 아닌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질 때 여성들이 임신유지 여부를 자유롭게 그리고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회, 종교계에 제안한다. 이제 ‘낙인과 처벌’이라는 실효성 없는 과거의 낡은 방식에 얽매이지 말자. 여성들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사회·경제·문화적 조건을 만드는 미래지향적 방식으로 나아가자. 그것이 진정한 생명 보호의 길이다.
그리고 ‘낙태죄’는 떠나보내자. ‘낙태죄’ 전면 폐지는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 삼고 형벌권을 통해 통제해온 역사, 여성의 경험을 삭제한 전체주의 시대의 폭력성에 대한 반성과 사과의 출발점이다. ‘낙태죄’ 전면 폐지는 ‘판단력 부족’, ‘분별력 없는’ 같은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결별하고 여성을 진정한 국민, 시민권을 가진 주체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낙태죄’ 전면 폐지는 개인의 윤리적, 종교적 잣대로 ‘낙태’한 여성을 살인자로 매도하고 낙인찍는 야만적 폭력과 단절하는 관문이다. 이제 그 관문을 통과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