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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국제노동기구 기본협약을 비준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 / 남궁준

등록 2020-10-28 17:59수정 2020-10-29 02:39

한국-유럽연합 분쟁의 의미

남궁준 ㅣ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

국제노동기구의 기본협약 비준이 화제다. 사실 오랫동안 논의해온 문제지만 우리가 지금 이 문제로 유럽연합과 외교 갈등을 겪고 있고 경제적 불이익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에 더 이목을 끄는 듯하다.

주지하듯 유럽연합은 지난해 7월4일 한국과 유럽연합 간 자유무역협정에 따른 전문가패널 설치를 요청했고 지난 10월8일과 9일 화상 심리가 이루어졌다. 그사이 정부는 노동조합 관련 3개 법률의 개정안과 3개 기본협약 비준동의안을 지난 6월과 7월 각각 국회에 제출했다. 유럽연합의 비무역적 제재 가능성에 대비하고 통상 관련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것이 주요 동기였다.

한국-유럽연합 분쟁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데, 그중 하나는 최초라는 상징성과 그와 결부된 정치적 무게이다.

유럽연합이 통상협정 안에 노동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장치(‘노동조항’)를 처음 도입한 것은 1995년의 개정 로메(Lomé) Ⅳ 협약이다. 그러나 현대적 노동조항의 틀을 구축한 첫 무역협정은 한국-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이다. 노동조항과 관련해 정부 간 협의가 이루어진 것도, 전문가패널이 소집된 것도, 심리가 이루어진 것도 유럽연합 역사상 모두 최초다. 유럽연합 밖으로 눈을 돌리면 최종 분쟁해결 절차를 통해 노동조항 위반 여부를 다툰 사례가 하나 있다. 중미자유무역협정에 따른 미국-과테말라 분쟁이 그것인데, 미국이 패소하여 지금까지 노동조항 위반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선례는 없다. 따라서 만약 11월 말 전문가패널의 보고서가 한국의 위반을 판정할 경우 우리는 자유무역협정 노동조항을 위반한 첫번째 국가가 된다.

전문가패널의 심사 결과는 국제정치적 불명예 차원을 넘어 법적 위험도 증대시킬 수 있다. 물론 ‘노동조항 위반 자체’를 이유로 한국-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에 ‘직접 근거한’ 무역제재는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사실상의 정치적·경제적 불이익 조치가 가능한 보복 수단으로 검토되었다. 그러나 다른 국가와 체결한 자유무역협정을 살피면 사정이 다르다. 미국 및 캐나다와 각각 체결한 자유무역협정은 노동조항 위반이 궁극적으로 특혜관세 철회나 벌과금 부과로 이어질 수 있다. 게다가 두 자유무역협정 모두 한국-유럽연합 분쟁의 대상 조항 중 하나와 유사한 규정을 두고 있다.

무역-노동 연계 제도는 자유무역협정 노동조항에 그치지 않는다. 2018년 전후로 각각 발효된 유럽연합의 반덤핑 계산방식 변경과 무역구제 현대화 규정이 한 예다. 이 규정은 수출국의 노동기준과 기본협약 비준 여부가 ‘임금 왜곡’ 여부, ‘가격약속’ 수용 판단 등에서 중요하게 고려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실제 유럽연합은 새 기준을 적용해 반덤핑 조사를 한 후 중국 기업을 대상으로 유기코팅 철강(2019), 스테인리스 스틸 열연 코일(2020)에 대하여 반덤핑 (임시) 관세를 부과했다. 2014년 채택된 공공조달에 대한 유럽연합 지침도 유사한 예다. 이 지침은 회원국이 공공조달 계약을 체결·이행하는 사업자가 노동 관련 유럽연합/회원국 법, 단체협약 및 기본협약 등을 준수하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아동노동 사용 및 인신매매 전력이 있는 사업자를 조달에서 배제할 의무를 부과한다.

자유무역협정 노동조항의 지속적 위반은, 유럽연합이 위와 같은 제도를 우리에게 부담이 되는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이용할 정치적 동기를 제공할 수 있다. 제도의 노동 관련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증거로서 간접 활용되어 법적 불이익을 줄 수도 있다. 아직 크지는 않지만, 개연성의 문제이지 가능성의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통상환경은 지난 몇년 지속된 보호무역주의와 포퓰리즘으로 바로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길이다. 기본협약 비준은 이 길을 조금 더 안전하게 걷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오래 미뤄왔던 국제적 책무를 이제 이행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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