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석 ㅣ서울시 강남구의사회장
의사들은 졌다. 정부가 아니라 국민과 여론에 졌다. 대중민주주의에서 여론이 얼마나 중요한지, 정책결정 과정에서 여론을 설득하고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전교 1등’이었다는 엘리트 의식에 취해, ‘국평오’(‘국민 평균은 수능 5등급’이라는 세설)가 ‘의료를 뭘 알아’라는 오만에 취한 탓인지도 모른다.
지난 8월7일, 전공의 파업으로 시작된 의사들의 저항은 요원의 불길이었다. 막상 파업을 시작하자 정부는 절절매는 것처럼 보였다. 경찰청장, 국세청장까지 참여한 범정부 대책 회의도 열렸지만, 뾰족한 대응 수단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두달이 지난 요즘, 의대 본과 4학년생들의 국시 재응시를 위해 서울의 25개 구의사회 회장들이 국민권익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일부 대학 병원장들은 대국민 사과도 했다. 파업 의사들은 멀쩡한데, ‘미래의 의사들’에게만 피해가 가게 됐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의사들은,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이 독단적으로 의-정 협정을 맺은 결과라고 말한다. 남 탓을 하면 끝이 없다. 최 회장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다. ‘안되는 집안’일수록 자책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니 나부터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정부의 ‘4개 의료 정책’에 대해 의사들이 저항할 때까지만 해도 여론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코로나19에 의사들이 보인 헌신 덕도 있을 것이고, 현 정부에 비판적인 이들의 지지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파업이 물꼬를 돌렸다. 의사들이야 ‘파업’으로 부르지만, 국민에게는 ‘진료 거부’였을 것이다. 세금이나 다름없는 건강보험료를 ‘자신의 가입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내야만 하는 국민 입장에서, 어찌 됐든 건강보험료로 조성된 돈을 ‘지급금’으로 받는 의사들의 파업은 애초부터 지지받기 힘든 구조다. 와중에 중환자실이나 응급실에서마저 전공의들이 ‘휴가’를 명목으로 빠졌을 때,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다.
전공의 파업에 이어, 의대생들까지 수업 거부와 국시 거부를 선언했을 때 의사들은 어떤 행동을 보였던가? 4·19 혁명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부추기지는 않았는가? 제발 냉정히 돌아보자. 우리의 파업이 4·19처럼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이었나? 몇몇 의과대학에서는 “제자들이 다치면 교수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지지 성명’까지 나왔다. 제자를 아끼는 마음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국민의 마음이 어떠할지 나부터 헤아렸어야 했다. ‘의대 교수라는 사람들이 제자들에게만 관심이 있지 환자가 어찌 되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국민이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싸움은 그 어떤 대의명분을 가지고도 질 수밖에 없다.
나부터 변해야 한다. 세상과 동떨어진 갈라파고스에서, ‘우리는 남보다 뛰어난 집단’이라는 ‘아일랜드 멘탈리티’(island mentality)에 빠져서는 의사들이 앞으로 그 어떤 사회적 발언을 해도 국민적 동의를 받기 힘들 것이다. 의협 소속 연구소에서 ‘전교 1등 출신의 의사들’ 운운한 문구를 대국민 홍보라고 냈을 때 돌아온 국민의 비아냥과 조소가 그것을 웅변한다.
나는 변해야 한다. 의료 정책을 ‘의사 중심으로만’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오만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코로나19로 자영업자들이 힘없이 쓰러지는 요즘, 의사들이 힘들다는 소리는 배부른 자의 푸념일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머리 숙여 말씀드린다. 국민 여러분, 모든 잘못은 저 같은 사람이 저지른 것입니다. 때리더라도 저를 때리십시오. 향후 의료인력 부족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의 예방과 미래 의료를 책임질 본과 4년생들을 위해 의사국시에 재응시할 수 있도록 선처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