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트 랑게 ㅣ 유럽의회 국제통상위원장
“Pacta sunt servanda.”(팍타 순트 세르반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라는 뜻의 라틴어 법격언이다. 체결한 협정은 신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성실하게 이행해야 한다는 원칙은 규범 기반 국제질서의 주춧돌이다.
통상 분야에서 이 원칙은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이 되기 위해 맺은 약속은 물론이고 발효 중인 양자간 무역협정에도 적용된다. 양자간·다자간 협정은 수년 동안 증가하여 무역 통합의 주요 동력이 되었다. 최근 무역정책은 점점 그 폭을 넓혀 관세, 수입 할당, 시장 접근과 직접 관련 있는 문제 등 전통적인 무역의 범주를 벗어나는 이슈들을 다루게 되었다. 오늘날 무역협정은 규제협력, 서비스, 국경간 데이터 이동, 지속가능성과 같은 문제를 포함한다. 무역협정은 자유무역과 공정무역에 대한 현대적 도전 과제들을 다루는 종합 문서다.
유럽의회는 무역의 범위를 확장하여 지속가능성이라는 문제가 포함되도록 오랫동안 싸워왔다. 유럽의회가 영향을 미친 결과, 노동권과 환경 기준이 유럽연합 무역정책의 필수 구성요소가 되었다. 유럽사법재판소가 내린 판결에서도 강조되어온 사실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유럽의 가치를 다른 나라에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공적인 국제 협력의 결과로 다자 기구가 수립한 보편적 가치들을 촉진하려는 것이다. 이런 가치가 조약에 명시되면 여기에 서명한 모든 당사국이 이를 이행할 것을 기대한다. 바로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원칙이 충실히 지켜질 때 동반자 관계가 성장하고 기업이 번창할 수 있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환경이 보장된다. 이 원칙은 무역정책이 제 기능을 하도록 만드는 필수 요소다. 따라서 결코 가볍게 다뤄져서는 안 된다. 지금처럼 국제질서가 의문시되는 시기에는 특히 각국은 자신이 국제사회와 맺은 약속을 어떻게 지키는가로 판단된다. 각국이 체결한 협약 전체를 온전히 이행하는지가 관건이다.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이 그러한 사례다.
첫눈에 보기에는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은 양쪽 모두에게 성공적인 사례다. 협정이 다루는 분야에서 무역은 양방향 모두로 활발해졌고 양자 간의 관계는 촉진되었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이 협정의 한 장에 대해서만큼은 오랫동안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무역과 지속가능 발전에 관한 장’에 명시된 약속은 다른 장에 비해 이행이 훨씬 더뎠다. 유럽 쪽 기업, 시민사회, 노동조합 대표로 이루어진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 국내자문단은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종을 울렸다. 국내자문단 구성원들은 한국 정부가 한-유럽연합 간에 체결한 자유무역협정에 명시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 노력 약속을 심각하게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국제통상위원회와 유럽의회 전체는 실태를 진단하고 한국에 직접 대표단을 파견한 뒤 국내자문단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분명하게도 무역협정 내 각 장의 중요도가 모두 같지는 않다. 한국의 국내법이 8개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에 완전히 일치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국제노동기준 준수에 관한 의무 이행에 아무런 진척도 없다는 상황을 수많은 유럽의회 의원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에서 유럽의회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의무 불이행에 관한 분쟁 해결 절차를 개시할 것을 호소하고 또 지지했다.
마침내 한국이 국제노동기구 핵심 협약, 그 가운데 특히 ‘결사의 자유’에 관한 협약 비준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한 나라의 국내법을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도록 개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이 약속을 폄하하거나 무시하면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제노동기구 핵심 협약 비준이 협약의 의미 있는 이행과 함께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유럽의회는 한국이 약속한 대로 실행하는 파트너 국가이길 원한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원칙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원칙으로서, 한-유럽연합 간 협력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