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욱 | 이화여대 로스쿨 교수
벌써 2년이나 지났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중 결사의 자유에 관한 제87호, 제98호 협약 비준에 대비하여 노동법을 정비하기 위해 10개월간 격론을 벌였으나, 노사 합의는 결국 불발됐다. 그러나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이라는 당대의 과제 앞에서 공익위원들은 전문적 견지에서 공익안을 제시하는 데 만장일치로 합의하고, 핵심협약에서 제시하고 있는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면서도 우리나라 노사관계 특수성을 고려한 공익안을 두차례에 걸쳐 제시했다. 정부는 공익안을 기초로 노동법 개정안을 지난 6월23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했고, 현재 국회에 상정되어 있다.
공익안이 국제적 보편성과 우리의 특수성을 균형 있게 반영하려고 한 까닭에 정부안도 노사 양측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받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정부 법안은 노사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립지대를 설정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물론 노동법에서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균형만이 능사는 아니다. 국제노동기준을 완전히 실현하는 국가는 없다. 노동법제도는 나름의 국내 사정이 어느 정도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핵심협약을 비준하는 이상, 국제노동기준에 본질적으로 위반될 여지가 있는 내용은 수정하여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정부 법안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노사 대화를 통한 보완이 여전히 필요하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빠른 시일 내에 노사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고, 대화의 장마저 없다는 것이다.
노사 합의를 무작정 기다릴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유럽연합(EU)이 제기한 무역분쟁 때문이다. 2011년 발효된 유럽연합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은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과 결사의 자유 원칙 준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이 두가지 의무 위반을 이유로 유럽연합은 2018년 12월17일 우리나라와 공식적 분쟁해결 절차에 착수하였다. 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분쟁 절차의 최종 단계인 전문가패널 심리가 지난 10월에 진행됐다.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시작으로 하여 현재 발효 중인 자유무역협정 중 80%가 넘는 78개 이상에서 노동조항을 두고 있다. 유럽연합과의 분쟁에서 혹시라도 우리나라의 자유무역협정 위반이 인정된다면 우리나라는 자유무역협정의 노동기준을 위반한 세계 최초의 국가라는 오명을 덮어쓰게 된다. 촛불시위, 코로나 사태를 통해 모든 국민의 노력으로 방역, 인권 옹호와 민주주의 선도 국가로서 힘들게 쌓아왔던 노력은 사라지고, 노동권을 무시하는 국가로 공식적인 낙인이 찍혀 국가 신인도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명예의 실추에 그치지 않고 경제적 불이익이 실제로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은 노동조항 위반이 인정되더라도 직접적인 무역제재를 규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유럽연합과의 분쟁이 결국 어디로 향할지 그 결과가 무엇을 낳을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유럽연합과의 분쟁에서 결사의 자유 원칙 위반이 인정된다면, 한-미 자유무역협정, 한-캐나다 자유무역협정에서도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 있다. 이들 자유무역협정에서도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과 동일한 노동기준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과 달리 관세철회 등 무역제재와 함께 벌과금 부과가 가능하다. 미 대선 과정에서 조 바이든 후보는 통상 상대국이 노동권을 존중하도록 강력히 요구할 것이며, 인권과 노동권이 보장되는 공정한 국제무역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공격적인 통상집행조치”를 취하겠다는 뜻을 여러차례 밝힌 바 있다. 미국 민주당의 공약도 통상에서 “인권과 노동권에 대해 이행강제가 가능한 강력한 기준”을 확립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다면, 유럽연합과의 분쟁에 잠재된 통상 리스크가 현실화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세계 7위의 수출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노동법 개정은 노사만이 아니라 국민 경제 전체의 명운을 건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 노동법 개정 국면에서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노사가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국회가 지금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한다. 시간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