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근ㅣ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지난 30일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가 발표되었다. 모든 사회과 필수과목(지리총합, 역사총합, 공공) 교과서(30종)에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기술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라며 “국제법상 정당한 근거에 따라 1905년 자국의 영토로 편입했다”거나,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어 일본 정부가 “국제법상 평화적 수단에 의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기술한 부분이다. 이러한 내용은 일본이 국제법을 준수하는 평화국가인 반면, 한국은 불법을 자행하는 국가로 인식하게 하는 매우 왜곡되고 편향된 것이다.
일본이 말하는 국제법이란 무엇인가? 본디 법이란 불법에 협조하는 것이 아니다. 법은 정의를 지향하며 정의는 올바른 관계로 통한다. 그래서 법의 제 역할은 사회 구성원 간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국내법은 물론이고 국제법도 예외는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국들은 과거 제국주의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 후 이웃국가들을 무력으로 침탈하며 만든 일그러진 관계들을 올바로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냉전의 격화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과거사 청산에는 불완전했지만, 일본 스스로 국제법을 내세우며 과거의 불법적 행태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올바른 관계란 무엇인가? 17세기 말 조선과 일본 정부가 울릉도 쟁계(1693~1699년)를 통해 내린 결론, “울릉도 외 1도(독도)는 조선의 영토”라는 것에 기반한 것이다. 이때 결착된 관계는 적어도 1904년 러일전쟁 전까지 유효하였다. 이것은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1870년), ‘태정관 지령’(1877년), ‘대일본국전도’(1880년) 등 과거 일본 정부의 문서나 지도들이 스스로 증거하고 있다. 또한 그 관계가 얼마나 철저히 지켜졌는지는 1836년 아이즈야 하치에몬이란 자가 몰래 울릉도에 드나들다가 처형을 당하고 일본 서해안 곳곳에 일본인들의 울릉도 도항 금지를 알리는 팻말이 세워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1870년대 일본 내에서 정한론의 대두와 함께 이러한 체제의 변경을 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1882년 조선 정부의 울릉도 검찰사 파견 이후 일본인들의 울릉도 불법 이주와 삼림 도벌이 외교문제로 비화하였는데,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단속하는 흉내를 내더니 차츰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1902년에는 일방적으로 울릉도에 일본 경찰 주재소를 설치하고 그 불법 세력을 비호하기까지 하였다.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한 행위들이다.
1900년 대한제국이 칙령 제41호를 제정하는 등 울릉도 관리를 강화하자 일본은 독도로 눈을 돌렸다. 러일전쟁 중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은밀히 편입하고 해군 망루를 설치하여 전쟁 기지로 활용하였다. 일련의 행위들이 국제법상 정당한 근거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일본 정부가 독도 관련 사항에 대해 국제법상 평화적 수단에 의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국은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SCAPIN 1033호 등)를 통해 일본 선박이 독도에서 조업하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일본 측에서는 이를 어기고 몰래 불법 조업을 감행하였다. 또한 6·25전쟁 중에는 독도를 미공군의 폭격 연습지로 지정하도록 유도하고 독도에 불법 상륙하여 마치 자기네 영토인 것처럼 팻말을 박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모략적인 음모로도 독도 탈취가 어렵게 되자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거론하며 국제법에 의한 평화적 해결을 운운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법은 올바른 관계의 회복을 지향하며 불법적 행위를 두둔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 교과서의 독도 기술은 결코 평화롭지도 공공연하지도 않은 과거 일본의 불법적 행태를 마치 국제법상 정당한 행위인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행태는 갈등과 대립을 부추기며 국제사회와 미래세대에 크나큰 불행의 짐을 지우고 있다. 과거에 거듭된 침략전쟁으로 이웃국가들의 주권과 인권을 유린했던 일본으로서는 역사상 올바른 관계의 회복을 위해 더 큰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