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김성배ㅣ전 국정원 해외정보국장·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비록 기조만 공개됐고 그마저도 익명의 당국자를 인용한 백그라운드 브리핑 형식이었지만 우리 정부에 설명한 내용과 명사, 형용사, 동사까지 일치한다니 대강은 공개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예상대로 크게 놀랄 만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볼 만한 대목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싱가포르 합의’를 존중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명한 이 합의를 무시했다면 북한은 바이든 정부를 아예 상대조차 않으려 했을 것이다. 이로써 비핵화 협상을 백지상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실용적 접근법”이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단계적 해법을 수용한 점도 평가할 만하다. 북한의 핵능력을 고려할 때 ‘단계적 동시행동’ 외에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을 결렬로 몰아간 원인 중의 하나가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빅딜 아니면 노딜’ 식의 접근이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또한 바이든 행정부는 북한의 조처를 전제하긴 했지만 김정은 위원장의 최대 관심사인 “제재 완화”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한·미·일 협의 과정에서 일본이 집요하게 ‘시브이아이디’(CVID,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 포기)라는 문구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그동안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 비핵화’라는 용어를 혼용해 혼란을 초래했으나 이번 계기에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로 통일했다. 북한의 일방적인 핵 포기를 연상시키는 ‘북한 비핵화’라는 용어 대신에 싱가포르 합의에 들어 있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선택함으로써 비핵화 협상의 연속성을 제고한 것으로 평가된다.
북한의 반응은 아직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 설명 제안을 일단 ‘접수’했다고 하니 심사숙고의 시간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도 북한은 미국의 중대한 제안이 나오면 다양한 루트의 정보 수집을 거쳐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어느 정도 시간을 쓰는 패턴을 보였다. 적어도 한번은 미국의 새로운 대북정책을 두고 북-미 간 접촉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경우 북한은 뉴욕 채널 등 실무선보다는 바이든 행정부의 책임 있는 당국자가 나서서 직접 설명할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데에는 우리 정부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의 유산에 대한 거부감으로 싱가포르 합의를 계승하는 데 주저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이 거들떠보지도 않을 만한 대북정책이 나왔다면 한반도 정세는 현재의 교착 상태를 넘어 북-미 간의 ‘강 대 강’ 대치로 치닫게 되었을 것이다.
한가지 의아한 점은 남북관계에 대한 원론적인 언급마저 없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드러난 것이 바이든 행정부 대북정책의 모든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골격은 제시됐다는 점에서 남북관계 요소의 누락은 아쉬운 대목이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에 대한 배려는 차치하고라도 남북관계 발전을 환영한다는 ‘립서비스’마저 없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동안 한-미 협의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평화 프로세스에서 남북관계의 중요성을 힘주어 강조했을 터이기에 더욱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오는 21일에는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첫번째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북한도 한-미 정상회담에서 어떤 후속 메시지가 나올지 주목할 것이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의 남북관계에 대한 ‘지지’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래야 북·미 사이에서 우리 정부의 역할 공간이 생긴다. 최소한 남북관계의 발전이 한반도의 비핵화에 기여한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언급이나 공동성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의 비핵화 협상에서도 가장 아쉬운 것이 미국의 남북관계에 대한 전략적 고려가 없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한-미 워킹그룹 회의에서 번번이 남북 간 교류협력에 대해 대북제재 위반이라는 옐로카드를 꺼내 들곤 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동맹을 존중한다니 핵심 동맹국인 한국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김정은 위원장이 참가한 세차례의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재가동의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