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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시장에 맡기자’는 쉬운 말

등록 2021-06-02 17:02수정 2021-06-03 02:37

[왜냐면] 이성섭 l 숭실대 명예교수·한국제도경제학회 회장

‘시장이란 무엇인가?’ 경제학에 이 질문이 없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사실이다. 경제학자들은, 무슨 문제에 당하든지 “시장에 물어보라”고 말한다. 그러니 출발이 시장에 대한 분석적 정의에서 시작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시장을 분석적으로 정의한 경제학자가 드물고 있다고 해도 정의가 불완전하다. 그렇게 두꺼운 경제원론 책을 열어봐도 시장의 정의를 분명하게 다룬 장이 없다. 시장제도란 주제의 책도 없고, 전공도 없고, 분야도 없다.

경제학자들은 시장을 ‘주어진 것’(taken for granted)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렇다. 시장이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고 작동하는’(ubiquitous)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세상에 가장 불가사의한 질문이 이것이다. 기독교에서 하느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계신다고 본다. 경제학에서 시장은 하느님의 권능에 비견되는 존재인 셈이다. 경제학의 시조인 애덤 스미스도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자원배분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해서 실행된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손은 하느님을 말한다.

개인의 재산권이 인정되지 않고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하던 사회주의 체제에서 시장경제 체제로 이행하던 시절의 러시아는 1992년 초 국가 소유 생산시설을 일시에 사유화하는 빅뱅급 정책을 단행한다. 당시 이 사유화 정책을 지휘한 것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제프리 색스 교수 팀이었다. 사회주의 시절 러시아는 규모의 경제를 도모하고자 중요 상품의 생산을 소수의 플랜트에 집중하는 대규모 생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 대규모 생산체제에서 생산 과정은 생산의 각 단계가 다음 생산 단계로 연결되는 시스템이었다. 각 생산 단계는 분할되어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 분할된 단계들이 각기 다른 주인에게 사유화된 것이다.

국제통화기금은 생산의 각 단계에 소유권을 정해주면 자원의 배분은 시장이 알아서 해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에는 시장제도가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생산 각 단계의 제품을 다음 생산 단계의 생산조직에서 팔고 사는 중개소도 없었고, 구입 자금이 없는 경우 신용을 제공할 금융기관이나 금융상품도 존재하지 않았다. 공정거래의 기준도, 이를 집행할 조직도 없었다. 모든 자원이동이 중지되었고 생산은 정지되었다. 굶주림과 인플레이션이 밀어닥쳤다. 생산설비는 고철이 되었고, 농업 생산물도 운송수단의 정지로 현지에서 부패하였다. 연금은 휴지 조각이 되었고, 마피아만 활개 치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 러시아의 정치가 그때의 정책 실패와 무관하다고 부인할 수 있을까?

시장교환이란, 원시적인 공감교환으로부터 가격이라고 하는 새로운 공감 방식으로 교환이 이루어지는, 교환 방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원시적인 공감교환으로부터 시장교환으로의 전환 과정이 바로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이다. 역사적으로는 13세기에 시작되는 중상주의 시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중상주의 시기에서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의 기간(13~18세기)이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는 기간으로 중요하다.

이 기간 시장이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하는 시장제도(화폐, 각종 금융상품, 물리적 표준, 공정거래의 표준, 재산권의 표준, 도덕, 관습, 법-판례 등), 시장 인프라(통화 발행 및 관리, 자본시장 인프라, 간접금융 인프라, 지급-결제 인프라 등), 시장조직(통화의 발행 및 관리 조직, 자본시장 관리조직, 간접금융 관리조직, 지급-결제 관리조직, 공정거래 관리조직, 검찰·경찰 및 사법부의 재산권 관리조직 등)이 만들어지고 발달되었다. 이것은 수백년 내지 천년의 세월을 요하는 작업이다. 후발주자의 압축적 학습이라고 해도 백년을 요하는 작업이다.

문제는 경제학에 이 시장제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을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시장에 맡기자’는 말을 쉽게 하는 것이다. 도대체 ‘시장에 맡기자’는 주장의 시장제도에 대한 표준 개념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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