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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건희 미술관, ‘우리도 좀 살자’는 아우성

등록 2021-06-21 17:08수정 2021-06-22 02:11

[편집국에서] 이순혁 ㅣ 전국부장

“대한민국의 자랑이자 세계적 기업을 일군 이건희 회장님의 미술관이 바다미술관이 될 엑스포장 주제관에 유치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 해도 신이 나요. 대통령님, 황희 장관님! 꼭 여수에 유치되게 도와주세요.”

이달 초 전남 여수 송현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썼다는 편지의 한 구절이다. 여수교육장과 교장, 담임 선생님의 지원과 격려 아래 이달 첫주에만 7개교 학생 400여명이 문재인 대통령과 김부겸 국무총리,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에게 이런 ‘간절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썼다고 한다.

지난 15일에는 경남예술고 학생회장과 부회장이 교장 선생님과 함께 이건희미술관진주유치위원회를 찾았다. 이 학교 학생들이 이건희 미술관 진주 유치를 염원하며 접었다는 종이학 2천마리와 직접 그린 엽서들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간절한 마음과 소중한 정성이 담긴 종이학과 엽서는 대통령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소중히 전달할 것”(권순기 유치위원장·경상국립대 총장)이라는 답례 인사에, 학생들은 “문화분권을 통한 문화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미술관이 진주에 유치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단다.

지난 4월28일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평생 모은 문화재와 미술품 2만3천여점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발표가 나온 뒤, 전국 각지가 들썩이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너도나도 ‘이건희 미술관을 우리 동네에 지어달라’며 경쟁에 나섰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의 모태임을 자부하는 대구에서는 이건희 미술관과 조각공원·야외공연장·음악분수·잔디광장 등을 갖춘 3만2천㎡ 규모 복합문화공간 국립이건희헤리티지센터를 짓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대구와이엠시에이(YMCA) 등이 성금 모금에 나서는 등 민간에서도 힘을 보태고 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태어난 경남 의령에서도 유치추진위가 구성돼 ‘이건희 미술관, 삼성그룹 창업주의 고향 의령으로!’, ‘삼성의 뿌리 의령에 이건희 미술관 유치하자!’라는 펼침막 300여장이 읍내에 휘날리고 있고, 이 회장이 나온 초등학교가 있는 경남 진주의 유치 열기도 그에 못지않단다.

세종시도 ‘국가균형발전의 상징 도시’라며 명함을 내밀었다.

에버랜드와 호암미술관이 있는 경기 용인, 삼성전자 본사와 이건희 회장 묘소가 있는 수원, 이 회장 자택과 리움미술관이 있는 서울 용산에 인천까지 수도권 자치단체들도 구애 경쟁에 가세했다.

이런 상황을 씁쓸하게 보는 이들도 있다. 이건희 컬렉션이란 게 삼성 비자금이라는 음습한 기원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 뒤 삼성 비자금 수사에 나서 사건의 윤곽을 그려 특검에 넘겼던 검찰 특별수사·감찰본부 관계자는 당시 “미술품은 별다른 문제 없이 재산을 상속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라며 “미술품 구입은 비자금 조성 사건의 곁가지가 아니라 몸통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례 없는 규모의 공공기증으로 이건희 컬렉션이 온 국민이 누릴 수 있는 문화 자원이 됐다는 점은 그 자체로 평가받을 만하다. 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한 단계 올리는 계기를 만든 유족들의 의지도 폄하받을 이유는 없다.

다만 고사리손들이 편지를 쓰고, 입시 준비에 한창일 고교생들이 종이학을 접게 만든 지자체들의 유치 경쟁은 왠지 모를 서글픔을 남긴다. ‘우리도 좀 살자’는 생존의 아우성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 단위 가치를 지녔다는 이건희 컬렉션을 소장할 미술관이 들어서면, 전국적인 명소가 될 테고 지역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출생률 저하와 갈수록 심해지는 수도권 쏠림 속에서 소멸 위기를 맞고 있는 ‘변방’에서야 이런 기회가 얼마나 절실하겠나. 쇠락의 길을 걷다가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한 뒤 도시재생에 성공해 세계적인 관광지로 다시 태어났다는 스페인 북부 도시 빌바오 사례도 있다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시피, 경쟁에 나선 시·군 대부분은 패자일 수밖에 없다. 또 미술관 유치에 성공한들 교통·환경·문화 등 종합적인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는 한 빌바오는 남의 나라 얘기일 뿐이다. 지금의 과당경쟁이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고 마는 희망고문이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남는 이유다.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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