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상준ㅣ한국직업능력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참여소득은 1990년대에 영국의 경제학자 앤서니 앳킨슨에 의해 제안되었다. 교육, 훈련, 돌봄 같은 사회적 기여를 한 사람에게 소득을 지불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앳킨슨의 참여소득 주장은 너무 단순하고 논리의 세련함은 없었다. 참여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이며 참여의 범위와 가치를 어떻게 소득으로 환산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로 인해 영국은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필자가 참여소득에 주목하는 이유는 앳킨슨이 최초 제안한 이유와는 거리가 있다. 제3의 길로 상징되는 사회투자론 관점에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은 거시지표 수치상, 형식적 일자리와 복지정책을 일정 정도 성공시켰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유대감, 삶의 질 향상에서까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개인의 합리적 선택과 행위의 전 과정이 개인 성공을 위한 프로젝트라고 하였을 때 이 프로젝트 성공과 실패는 오롯이 개인이 책임지는 사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는 경쟁과 협력이라는 두가지의 축으로 발전해왔기에 프로젝트 실패 책임을 개인 탓으로 돌려버린 사람이 외로움에 빠지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라는 공동체의 따스함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따스함을 참여소득이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개인의 다양성과 정체성 보장이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서 획득된다면 과잉 노동력 사회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다양한 타인과 교류할 공간은 필요하다. 인공지능 기술이 미래의 고용시장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확정할 수는 없으나 지금의 고용사정보다 개선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잉여인간’, ‘쓸모없는 인간의 출현’처럼 극단의 사회적으로 배제되거나 버려진 자들을 위한 자리와 공간은 더욱 필요하다. 외로움 극복과 자아 정체성 실현을 위한 유일한 치유책은 유대감이며 이를 참여소득이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셋째, 누구나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는 참여소득이 개인 간 역량을 연결시켜주는 장치로 작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지역 주민의 공공적 공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역량을 발휘할 플랫폼 기능을 참여소득이 담당하게 하는 것이다.
앳킨슨은 참여소득 운영방식으로 자산조사를 하지 않는 비조건성, 현금지급, 특정 그룹에 한정하지 않는 보편성을 제안하였다. 정통 기본소득론자들은 실현 불가능한 참여소득 논의는 당장 멈추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이는 중앙정부 관점과 일원적인 논리 구조에 바탕을 둔 것이다. 개인이 사회에서 얻고자 하는 기대치는 천차만별로 다르다. 따라서 참여소득은 철저히 지방분권과 자발적 참여성 형태로 운영되어야 한다. 참여소득엔 민간영역이 담당하기 어려운 공공영역의 사회적 기여 형태, 그리고 참여의 내재적 동기와 외재적 동기의 절충이 가능한 수준의 소득이 필요하다. 공공영역 내 사회적 참여는 개인의 자유와 역량(capability) 확대를 방해하는 요인을 해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소소한 문제를 해결하는 생활정치의 공간이기도 하다.
참여소득 활성화를 위한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 첫째, 지방분권화이다. 참여소득은 지방분권화 수립을 위한 촉진제로 작동할 수 있다. 둘째, 지역 거버넌스 운영을 합리적으로 진행할 지역 역량 강화이다. 예를 들면 교육과 훈련, 유급 일자리 등은 당장 참여소득으로의 전환이 가능한데 이를 지역에서 합리적으로 운영할 역량을 강화하는 것은 참여소득 정착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마지막으로 참여소득의 행위를 고용(employment)으로 정의하지 말고 일(work)로 정의해야 한다. 고용 개념으로 접근하면 고용의 정의에 맞지 않는 사회적 기여의 일과 지역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행위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는 4차 산업혁명 기술 세계를 근간으로 경제 교과서 밖에서 작동하고 있다. 오늘날의 경제활동 부작용을 여전히 과거의 교과서를 가지고 해결하려는 것은 지금의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교과서 밖에서 대책을 찾아야 할 때다. 참여소득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