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진 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비가 주룩주룩 온다. 우산을 써봐도 바람이 부는 대로 들이치는 세찬 비로 옷은 흠뻑 젖는다. 사람들의 대화도 공사장의 소음도 빗소리에 파묻힌다. 도로는 고인 물로 가득하고 지나가는 자동차는 연신 물보라를 뿜어낸다. 빗물에 벗겨진 때가 흙탕물에 섞여 여기저기 도랑을 이루어 흐른다. 밝거나 어두운 색깔로 묻혀 있던 추억도 하나둘 씻겨나간다. 매년 장마철이 되면 일년 내릴 비의 절반가량이 이런 모습으로 숨 가쁘게 쏟아진다.
장맛비는 대양의 수증기가 계절풍을 타고 아시아 대륙의 열기를 찾아가는 대규모 지구촌 행사다. 여름으로 가면서 태양의 남중 고도가 높아지면, 광대한 아시아 대륙은 햇빛을 받아 달아오른다. 더워진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이를 메우기 위해 주변에서 바람이 모여든다. 티베트고원은 대륙 한가운데 우뚝 솟아 열기가 더욱 뜨겁고, 여기서 힘차게 상승한 공기는 멀리 시원한 바다를 향해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고원이 부르는 소리에 화답하듯 바닷바람은 멀리 남태평양에서도 찾아온다. 적도를 건너 아라비아반도와 인도를 거쳐 고대 신라에 이르기까지 혜초 스님이 다녔던 바다의 비단길을 따라 바람 띠가 이어진다. 필리핀 동쪽 해상에서 남해를 향해 이어진 또 다른 바람 띠와 합류하며, 아열대 해상의 많은 수증기가 우리나라 쪽으로 실려온다. 이때를 기다려 남쪽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남풍을 힘껏 껴안으면, 산호초와 비췻빛 바다를 건너고 이름 모를 섬의 진주조개잡이 배나 야자수나 차밭을 스치며 날아온 남국의 향기를 느껴볼지도 모를 일이다.
식물이 영양분을 축적했다가 꽃을 피울 때 일거에 몰아 쓰듯이, 대기도 태양으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우기에 몰아 쓴다. 아열대 해역은 연중 맑은 날씨에 햇빛을 듬뿍 받아 수온이 높고 에너지가 풍부하다. 바닷물이 증발할 때 이 에너지는 수증기로 옮겨 탄다. 계절풍을 타고 다량의 수증기가 우리나라로 이동해오면 여느 때보다 많은 비가 내린다. 계절풍은 아열대의 열기도 함께 실어 나른다. 장마철이 막바지에 이르면 푹푹 찌는 더위가 이어지다가도 열대 지역처럼 강한 소나기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강한 소나기가 올 때는 적도에 있는 싱가포르에 온 것 같기도 하고, 폭염과 열대야가 이어질 때는 홍콩이나 대만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장맛비는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식량을 안정적으로 수급하는 데 절대적인 자원이었다. 하지만 계절풍을 타고 흐르는 비구름의 강도나 진로는 매번 달라졌기 때문에 자연의 장단에 맞추기가 힘들었다. 빗물이 부족한 때는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갖다 쓰기도 했다. 저수지나 댐을 건설하고 관개수로를 확장해서 필요한 곳에 물을 실어 날랐다. 산림을 농지로 전환하여 곡물 수확량을 늘려나갔다.
그런데 이러한 자구책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왔다. 지하수를 퍼다 쓰면 토양 수분이 줄어들고 땅은 햇빛에 더 쉽게 가열된다. 반면 산림 대신 들어선 작물 재배지는 햇빛을 더 많이 반사시켜 땅이 가열되는 것을 저지한다. 땔감을 태우거나 산업활동으로 배출되는 오염 먼지들도 햇빛을 차단하거나 흡수하여 지면 온도에 변화를 불러온다. 대륙이 덥혀지면 바다와의 기온 차가 벌어져 계절풍의 강도도 세지고, 반대로 대륙이 식으면 기온 차가 줄어 계절풍의 강도가 약해질 수 있다. 장맛비의 변덕에서 벗어나보려 할수록 역설적으로 계절풍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장맛비를 예측하기가 더욱 까다로워진다는 얘기다. 항생제가 보급되면서 바이러스 내성이 강해지듯이, 자연에 대한 관리 영역을 넓히려 할수록 자연은 더욱 미묘하게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심술을 부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