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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구경꾼’들의 시대

등록 2021-07-11 15:36수정 2021-07-12 02:38

[기고] 정지우
문화평론가·<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저자

근래 우리 사회에 유령화된 개인들이 떠돌고 있다. 많은 지식인들이 우리 사회의 집단 갈등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고 진단하지만, 실제로 집단 자체는 와해되고 있다. 폭넓게 퍼지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집단들 간의 갈등이 아니라, 집단 갈등을 부추기며 타인들을 집단으로 규정하는 놀이들이다.

오히려 극히 개인주의화되고 각자도생이 진리가 된 세상에서 집단은 그 온전한 힘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최근 세대를 비롯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이 특정 집단에 속해 있다는 ‘집단 정체성’을 날이 갈수록 상실하고 있다. 특히, 청년 세대일수록 ‘집단’과 거리를 둔 채 개인적인 시간과 정체성을 확보하며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는 데 확실히 치중하고 있다.

그럼에도 세대, 성별, 계층, 직업, 정치적 세력 간 갈등은 매우 노골적이 되고, 점점 더 예민한 문제가 되며, 그에 더해 특정 집단에 대한 비난과 혐오, 조롱 등도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각종 ‘집단’은 와해되고 있음에도, ‘집단 갈등’은 심화하고 있는 것이다. 집단은 약해지고 있는데, 집단 갈등이 심각해지는 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가 ‘구경꾼의 시대’라는 관점이 필요해 보인다. 실제로 집단 갈등을 부추기는 이들은 집단 구성원들보다는, 집단 바깥의 구경꾼들이다. 실체가 있는 집단과 집단이 싸우고 있다기보다는, 구경꾼들이 특정 집단을 규정하는 작업을 통해 집단 갈등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가령, 한 아이의 엄마가 지하철에서 문제 되는 행위를 했을 때, 그에 대해 구경꾼들은 ‘맘충’ 같은 집단적 규정을 놀이처럼 확산시킨다. 특정 사건은 한 특정 인물이 만들어낸 일이 아니라, 아이 엄마라는 집단 자체의 속성으로 규정된다. 구경꾼에 의해 하나의 집단이 만들어지고, 그 집단에 대한 혐오와 공격이 확산되며, 마치 명확한 집단들 간의 갈등 같은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흔히 정치 시사 분야의 유튜브들을 보면, 끊임없이 특정 집단을 규정하여 일반화하고, 그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데 열을 올린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특정 집단 자체에 대한 규정과 편견을 심화한다. 또 다른 이들은 역시 그 반대편에 있을 것 같은 집단을 지목하고 일반화한다.

이렇게 생겨난 양 진영은 언뜻 보면 치열하게 대립하는 두 집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있는 것은 구경꾼들의 ‘규정화 놀이’에 가깝다. 이 구경꾼들은 여기에서 저기로 얼마든지 옮겨 다닐 수도 있고, 흥미가 떨어지면 그런 놀이에서 빠져나오면 그만이다. 그들은 그런 집단에 소속된 집단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특정 집단들을 지목하고 만들어서 놀이를 즐기는 개인화된 유령들에 가깝다.

이들은 마치 병 모양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액체와 같다. 이들이 담기는 틀 혹은 병이 비대해지고 과격해지는 것은 ‘집단 갈등’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과 묘하게 다르다. 집단과 집단이 실질적인 이익과 현실에 발 디디고 있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일반화하고 편견화하는 작업을 통해 존재하는 ‘상상’의 집합물이 되는 것이다. 그 속에는 진정한 집단이 없고, 그래서 개개인의 소속감도 없으며, 따라서 집단이 개인을 지켜주고 유지해내는 일도 없다. 있는 것은 오로지 공격과 혐오, 조롱과 멸시, 일반화와 규정화의 폭력뿐이다.

애초에 집단 갈등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여러 집단들이 갈등하며 사회를 보다 합리적이고 평등하게 만들어가는 것은 민주주의의 대의에 부합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오히려 그런 실질적인 집단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유령들의 유희만 남은 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든다. 나아가 정말로 현실적인 집단으로서 보호받아야 하고, 그 권리가 인정되어야 하며, 차별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집단들의 목소리조차 그 속에 파묻히고 있는 게 아닐까 우려스럽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구경꾼들의 유희가 더 중요하고 실재하는 문제들을 은폐하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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