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혐오는 힘이 세다. 사람을 연민하고 용서하고 품어주는 마음은 밀물처럼 서서히 몰려오지만, 누군가를 혐오하고 의심하고 배척하는 감정은 불화살처럼 쏜살같이 날아든다. 혐오는 일방통행이다. 듣지 않고 보지 않는다. 혐오는 논리와 실증을 거부하고 불신하며 음모론으로 덮어씌운다.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낳는다. 혐오하는 자들의 주장에 대항하다가 또 다른 혐오의 숙주가 되기 십상이다. 좀비와 싸우다 물리면 좀비가 되듯이 혐오에 감염되면 스스로 혐오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격렬한 혐오에 맞서 “내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아름다운 평화의 언어로 대항한 마틴 루서 킹은 그래서 위대하다.
대한민국 전체가 ‘혐오 바이러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근본적 원인은 사회적으로 누적된 불안과 절망일 것이다. 물려받을 자산이 없으면 아무리 ‘노오력’해도 삶이 더 나아지지 못할 거라는 절망과 분노, 한 발만 헛디디면 내 자리를 빼앗기거나 추락할지 모른다는 절박함과 불안감이 압력밥솥 안의 뜨거운 수증기처럼 도처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 혐오는 억눌린 불안감을 터뜨리는 기폭제이자 배설구가 된다. 이주민,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이단시하는 것으로 심리적 우월감을 얻고, 여성은 남성을, 남성은 여성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아 화풀이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혐오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사회적 약자끼리의 갈등으로 치환한다. 모두가 가해자이자 모두가 피해자인 세상은 지옥이다.
이런 반인륜적인 혐오가 가속되는 이유는 혐오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 환경에서 혐오는 중독성이 강하고 전파력이 높은 콘텐츠다. 강용석이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는 유튜브 후원금인 슈퍼챗 순위에서 2019년 세계 2위로 3억6000만원의 수입을 올렸고, 2020년에는 그 두배가 넘는 7억6500만원을 벌어들였다. 검증되지 않은 막말과 가짜 뉴스, 무분별한 차별과 혐오는 그 강도가 심할수록 수익이 커진다. 2019년 발표된 서울대 김지수의 논문 ‘인터넷 개인방송에서 혐오발언은 어떻게 비즈니스가 되는가?’에 따르면 여성 혐오 발언이 등장할 때 후원 수익금은 107% 증가하고 그 발언의 공격성이 높을수록 수익률도 높아진다. 혐오에 중독된 이들은 점점 더 강한 혐오를 갈구하고 심리적 배설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
그런데 왜 혐오산업은 제지당하지 않고 날로 번성하는 걸까? 혐오로 돈을 버는 사람들과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혐오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자들, 그들이 혐오 양산의 주범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가짜 뉴스를 인용해서 국정 질의를 하는 정치인들이 있고 그 발언을 여과 없이 보도하는 제도언론이 있다. 팩트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면 말고! 뒷골목에서 무허가로 제조된 혐오성 가짜 뉴스는 제도권 정치와 주류 언론의 공생 메커니즘 속에서 공적 인증마크를 단 정보로 둔갑한다.
정치인들이 혐오를 애용하는 이유는 강력한 팬덤과 충성도를 가진 ‘내 편’을 만들기 유리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부질없는 패싸움에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도 확연치 않다. 거대양당의 강성 지지층이 내거는 레토릭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고독한 선지자처럼 비장하고 엄숙하다. 이들에게 정치는 제로섬 게임이다. 내 편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은 상대편의 승리를 돕는 이적 행위이기 때문에 절대로 타협하거나 사과하지 않는다. 내 편은 늘 옳고 상대는 늘 불의하다. 내 편은 늘 각성되어 있고 상대는 늘 무지몽매하다. 극한적 선악 구도에서 공화주의적 평등과 공공선은 실종된다.
양당의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 사회의 미디어 어젠다는 고작해야 ‘바지 논쟁’, ‘표절 논쟁’에 머물러 있다. 조국의 자녀 입시비리 의혹에 시달려온 여당은 윤석열 부인의 논문 표절 의혹을 제기하기에 여념이 없고, 야당 신임대표는 여성 혐오와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여성가족부 폐지론으로 구시대적 회귀를 선도한다. 발등에 떨어진 기후위기, 부동산 대책, 불평등 해소의 난제 앞에서 후보 간, 정당 간 의미 있는 쟁점을 찾기는 힘들다. 저마다 ‘공정’을 입에 달고 나오지만 혐오와 차별의 폭주기관차를 제어할 최소한의 방어장치인 차별금지법 제정을 전면에 내세우는 후보는 보이지 않는다. 철학 없는 정쟁과 의미 없는 공방 속에서 상대 후보를 향한 혐오 공세만 치열하다. “그들이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간다”는 걸 말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줄 정치인이라야 도긴개긴의 후보각축전에서 빛을 발할 것이다. 유권자들은 아직도 그런 리더를 기다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