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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은전 칼럼] 영랑호를 그대로

등록 2021-07-19 04:59수정 2021-07-19 09:16

“나는 영랑호가 너무너무 좋습니다.” 등산 모자를 쓴 중년의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너무 사랑스러워서 슬며시 웃음이 났다. 그 말은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끄덕이던 고개를 멈추고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지하고 무거운 표정이었다. 너무 좋다는 말은 너무 무섭다는 말처럼 들렸다.

홍은전 | 작가·인권 동물권 기록활동가

속초에는 영랑호라는 호수가 있다. 아주 오래전엔 육지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바다였지만 긴 시간 동안 그 입구에 모래가 쌓이면서 서서히 바다와 분리되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분리된 건 아니어서 바다와 민물이 섞이는 이 호수엔 다양한 동물과 식물이 살고 있다. 지난봄 ‘영랑호를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려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으로부터 ‘영랑호 함께 걷기’ 행사에 초대받았다. 생애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나의 세계엔 오직 인간이나 인권밖에 없었다. 2년 전부터 동물과 동물권의 세계로 시야가 넓어지는 중이지만 아직 호수 같은 것에까지 닿을 정도는 아니다. 호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은 짐작이 잘 안되어서 망설였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소박한 듯도 하고 절박한 듯도 한 그 모임 이름 때문이었다. 함께 걷는 일, 그거라도 하려고 속초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무시무시한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터미널에 내려 영랑호까지 가는 동안 도로 이정표나 간판이 떨어져 나를 덮쳐올 것 같아서 잔뜩 몸을 도사리며 걸었다. 가까스로 영랑호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도 모르게 한숨이 쉬어졌다. “휴, 살았다.” 위태로운 비행 끝에 쉴 곳을 찾은 새처럼 나는 안도했다. 이곳엔 물과 나무, 바위와 갈대숲,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려는 사람들뿐이었다. 거친 바람이 멈출 기미가 없는 월요일 오후 2시였다. 생업을 잠시 멈춘 이들이 ‘영랑호를 지켜주세요’라고 적힌 몸자보를 입고 익숙하게 걷기 시작했고 나도 잰걸음으로 그들을 따랐다. 설악산 능선과 울산바위가 한눈에 들어오는 영랑호의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연신 감탄하며 걸었다.

한 바퀴를 돌고 난 뒤 우리는 동그랗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속초시는 관광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명목으로 영랑호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400미터 길이의 부교(물에 뜨는 다리)와 주변 데크, 야간 조명, 체험학습장 등을 건설하는 것이다. 환경단체 활동가가 강풍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부교 같은 인공 구조물이 건설되면 새들과 물살이 동물의 서식공간이 줄어들 뿐 아니라 호수 한가운데까지 관광객이 드나들기 때문에 그만큼 쓰레기가 버려지고 수질이 악화됩니다. 밤에도 꺼지지 않는 조명은 동물들에게 고통을 주고 갈대숲 위로 데크가 설치되면 새들의 집이 파괴되어 그들의 생존을 위협합니다.”

나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세상 옳은 말들의 운명이 그러하듯 그것들은 한 귀로 들어와 한 귀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다음으론 뭐라도 하려는 시민들의 소감이 이어졌다. “나는 영랑호가 너무너무 좋습니다.” 등산 모자를 쓴 중년의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너무 사랑스러워서 슬며시 웃음이 났다. 그 말은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끄덕이던 고개를 멈추고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지하고 무거운 표정이었다. 너무 좋다는 말은 너무 무섭다는 말처럼 들렸다. 가슴이 조금 시렸다. 책 <밀양을 살다>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나는 이 산이 진짜 좋아예.” 그 좋은 것을 지키기 위해 맞서야 하는 것은 높이 100미터가 넘는 초고압 송전탑이었다. 무엇을 반대하는지를 아는 것과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를 아는 것은 매우 다른 경험이란 걸 그때 알았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간간이 끊어졌다. 매일같이 1인시위에 참여한다는 한 여성이 혹시 공사를 막지 못할까 걱정스럽다며 울먹였고 그 애정이 고마워서 사람들은 소리 없이 웃었다. 한 어머니가 “20년 전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영랑호를 돌았을 땐 철새가 정말 많았는데” 하고는 울컥해서 고개를 떨구자 이제 스무살이 넘은 그때의 어린 딸이 “새들을 본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하며 씩씩하게 웃었다. 수천년 된 호수를 너무 사랑해서 울고 웃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 오후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잠시 동안 나는 흰뺨검둥오리나 수달, 가마우지, 갈대숲, 범바위 같은 것들이 포함된 세계 속에 있었고 반짝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지개도 보았던 것이다.

1년이 넘는 반대시위에도 최근 속초시가 공사를 강행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랑호 한편에 가득 쌓인 거대한 콘크리트 블록을 보고 억장이 무너질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라서 마음이 무겁다. <밀양을 살다>에서 가장 쓸쓸하고 아픈 말은 이것이었다. “송전탑을 세우기 위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나무가 잘려나간 산을 바라보며 그는 그래도 여전히 산이 참 좋다고 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더 늦기 전에 속초시가 영랑호 개발을 중단하도록 뭐라도 하려고 이 글을 쓴다. 영랑호를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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