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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은전 칼럼] 장애인 시설 폐쇄법이 필요하다

등록 2021-08-16 04:59수정 2021-08-16 13:41

한국 정부는 국제적 모델을 따르지 않고 큰 시설에서 작은 시설로 옮겨가는 것을 탈시설이라 부르면서 최중증 장애인의 경우 전문적 관리를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시설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국의 장애인이 노르웨이의 장애인보다 특별히 더 중증일 리도 없고 한국 정부가 노르웨이 정부보다 특별히 더 이들의 삶을 걱정할 리도 없다. 실은 이게 다 돈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홍은전 ㅣ 작가·인권 동물권 기록활동가

장애인 시설 폐쇄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1970년대 노르웨이는 장애인 탈시설 운동이 활발했다. 이 운동의 영향을 받아 1985년 노르웨이 정부는 <발달장애인의 생활 여건>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거기엔 이런 말이 있었다. “시설에서 발달장애인이 처해 있는 생활 여건은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그러면서 이러한 비인간적 상황은 시설 안의 활동을 새롭게 조직하거나 시설에 투입되는 자원을 증가시킨다 해서 실질적으로 변화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3년 뒤인 1988년, 일종의 시설 폐쇄법인 ‘노르웨이 개혁법’이 제정되었다. 믿기 힘든 이 사실은 김도현이 쓴 <장애학의 도전> 71쪽에 나온다.

법의 내용은 이렇다. 1991년 1월1일을 기점으로 더 이상 누구도 시설에 입소할 수 없으며 그로부터 5년 내로 시설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지역사회로 나가야 한다. 이 과정은 국가가 책임지고 진행했다. 그럼 이들은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을까? 그렇지 않다. 이들에게는 개인당 50㎡(약 17평) 이상의 독립적인 주거 공간이 제공되었다. 그럼 이들의 생활 지원은 누가 했을까? 다시 어머니의 몫으로 떠넘겨졌을까? 그럴 리 없다. 만약 그랬다면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시설 폐쇄를 통한 탈시설 정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놀랍게도 이들은 연간 2400만원 이상의 장애급여를 받았으며, 시간의 제한 없이 필요한 만큼의 활동 지원 서비스를 제공받았다. 스웨덴은 노르웨이보다 9년 뒤인 1997년에 시설 폐쇄법을 제정했고 2년 뒤인 1999년 12월31일까지 모든 장애인 시설을 폐쇄시켰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2021년 8월 한국 정부가 ‘장애인 탈시설 로드맵’을 발표했다. 앞으로 20년 동안 집단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이 단계적으로 지역사회로 나와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방안을 담고 있다. 그동안 일부 지자체의 정책을 통해 극소수의 용기 있는 장애인과 운동 사회에 의해 이루어져 왔던 탈시설이 국가적 차원에서 선언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여기엔 신규 시설의 설치를 금지하고, 한번이라도 인권침해가 발생한 시설은 즉시 폐쇄하며, 자립한 사람에게 주택과 주거 서비스를 지원하는 등의 고무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탈시설 정책을 먼저 펼친 국외 사례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시설을 ‘폐쇄’하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로 ‘개편’한다는 점이 그렇다. 장애인을 격리·수용해온 오랜 역사를 종식하는 첫 단추를 끼우는 이 중대한 시점에서 정부의 이러한 방향 설정은 매우 잘못되었다.

탈시설이란 모든 사람이 집단수용시설에서 나와 ‘개인별’ 주택에서 자립을 위한 서비스를 받으며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권리를 말한다. 하지만 정부의 계획에 따르면 이런 방식으로 탈시설 하는 사람은 고작 18.7%에 불과하다. 5명 중 1명만 제대로 된 탈시설을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12%의 최중증 장애인의 경우 시설에 그대로 남겨두겠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그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이들은 소규모 시설인 공동생활가정으로 흡수된다. 기존의 대형 시설을 소규모로 변환하는 데 국가 예산을 투입한다는 것인데, 이는 오히려 시설의 기능을 보강하고 권한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저 로드맵을 따라간다면 20년 뒤 우리는 소규모 시설이 대규모로 양산되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시설사회에 도착할 것이다.

탈시설은 국제적 흐름이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은 시설을 소규모화하는 일은 탈시설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한국 정부는 탈시설의 국제적 모델을 따르지 않고 큰 시설에서 작은 시설로 옮겨가는 것을 탈시설이라 부르면서 최중증 장애인의 경우 전문적 관리를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시설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국의 장애인이 노르웨이의 장애인보다 특별히 더 중증일 리도 없고 한국 정부가 노르웨이 정부보다 특별히 더 이들의 삶을 걱정할 리도 없다. 실은 이게 다 돈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 수준의 장애인 예산을 가진 나라다. 작년 국회에 발의된 탈시설 지원법은 우리가 만들 시설 폐쇄법이다. 10년 내 모든 시설 폐쇄,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탈시설 권리 보장, 개인별 지원이 명시되어 있다. 정부가 방향을 잘못 잡을 때 국민이 방향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 법이 통과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힘을 실어주면 좋겠다. 누구도 시설에 남겨두어선 안 된다. 어떤 시설도 남겨두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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