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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다 계획이 있었구나

등록 2021-08-16 17:21수정 2021-08-17 09:37

김회승 ㅣ 경제에디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강남 사옥으로 직행했다고 한다. 총수의 귀환을 알리는 신호다. 그의 가석방에 한동안 침묵하던 문재인 대통령은 “국익을 위한 선택”이라고 하고, 재계와 대다수 언론은 “사면이 아니어서 아쉽다”며 온전한 경영 복귀 조처를 채근한다.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관대함과 유죄를 받은 재계 거물에 대한 특혜의 역사를 확대시켰다.”(<에이피>(AP)통신)

“취업제한 규정 때문에 삼성의 실질적 지도자의 업무 복귀는 불분명하다.”(<월스트리트 저널>)

“한국 재벌과 가족경영 대기업을 개혁하겠다고 약속한 문재인 정부의 변화가 비판대에 올랐다.”(<파이낸셜 타임스>)

국내 주류 언론과 결이 다른 평가는 외신에서 가끔 보인다. 부끄러운 일이다.

삼성 총수 일가의 불법 대물림은 그 역사가 유구하다. 웬만하면 이젠 해소될 법도 한데 그렇지 못했다. 그들한테 유리한 전략과 프로그램을 꿋꿋이 밀고 나갔고,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 또한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성의 오너 리스크가 대를 이어 해결되지 않는 주된 이유다.

몇몇 결정적 장면들을 보자. 이병철 창업 회장은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형사처벌 위기에 처한 그는 박정희 군사정부에 한국비료를 헌납하고 경영에서 물러나는 척했다. 차남은 구속됐지만 자신은 기소를 면했다.

이건희 회장 때는 비자금 사건이 터졌다. 경영 퇴진을 선언하고 법에도 없는 구조조정본부를 해체하겠다고 했다. 실제 그럴 마음은 없었다. 유죄 선고를 받고 얼마 뒤 평창겨울올림픽 유치를 공약했고 이명박 정부는 1인 특별사면을 해줬다. 대신에 이 대통령이 자기 돈을 찾겠다며 벌인 다스 소송의 로펌 비용을 대납해줬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는 박근혜 정부 때 분기점을 맞았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라는 마지막 퍼즐을 맞춰야 했다. 이런 아킬레스건을 권력도 잘 알고 있었다. 공직도 없는 대통령 측근이 재단을 만들어 기업 돈을 뜯을 때, 삼성 총수 일가는 어떻게 알았는지 그를 찾아내 딸을 은밀히 후원하고 수십억원짜리 말을 사줬다. 대가는 삼성물산 대주주인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 의견이었다.

이 부회장의 석방은 정치인과 법률가, 언론인과 학자 등 우리 사회의 엘리트 권력 집단이 한껏 호의를 베풀어온 결과다. 보수·진보도 잘 구별되지 않는다.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생경한 회복적 사법 이론을 꺼내 드니, 삼성은 냉큼 준법감시위원회를 만들어 ‘앞으로 잘하면 된다’는 감형 논리를 폈다. 법원은 그를 법정 구속했지만 최저형을 선고했다. 그사이 법무부는 은근슬쩍 가석방 기준을 낮췄고, 광복절이 다가오자 재계와 정치권, 언론과 종교계가 나서 그의 석방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 여론과 반도체·백신 역할론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다 계획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삼성 떡값’을 고발해 고초를 겪은 노회찬 의원은 생전 국정감사 때 사법부를 향해 이렇게 꾸짖은 적이 있다. “‘수십년간 땀 흘려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 사회에 기여한 점을 감안해 감형한다’거나 혹은 ‘산업재해와 저임금에도 수십년 땀 흘려 일하면서 이 나라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가 있는 노동자이므로 감형을 한다', 이런 예를 본 적이 있습니까?”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 복귀는 이젠 시간문제인 듯하다. 취업제한 규정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문제가 될까.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취업제한 해제를 고려한 적 없다고 하지만, 이번 가석방도 처음엔 고려한 적 없다에서 출발했다. 회계부정 사건 등 다른 재판이 남았다고 하는데, 국익을 위해 풀어준 마당에 다시 엄중히 죄를 묻겠다는 용감한 판사가 과연 있겠나 싶다. 머잖아 이 부회장의 응답도 있을 거다. 몇개월째 끌고 있는 미국 반도체 공장 부지 선정 등 굵직한 투자 선물을 내놓을 거다.

여권 인사들로부터 문재인 대통령이 무슨 덕을 봤다고 삼성 총수를 봐주겠느냐는 항변을 듣는다. 전임 대통령들처럼 사익을 챙긴 게 없으니 국익을 위한 결정의 진정성을 믿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더 허망하고, 그래서 더 위험하다. 국익을 기업 총수에게 맡기는 나라는 없다.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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