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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백신을 믿는다’의 의미

등록 2021-08-26 15:51수정 2021-08-27 02:36

전치형|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다들 코로나19 백신을 맞고 있다. 나도 맞았고, 가족과 친구들도 이미 맞았거나 맞을 예정이다. 예약된 시간에 병원에 가서 예진표를 작성하고, 의사의 질문에 대답하고, 잠시 대기하다가 마침내 주사를 맞으면서 생각한다. 나는 왜 이 백신을 맞으려고 기꺼이 팔을 걷는가? 나는 왜 코로나19 백신을 맞는 것이 나와 가족의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가? 백신을 믿을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인가?

우선 떠오르는 대답은 우리가 과학을 믿기 때문에 백신을 맞는다는 것이다. 백신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과학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며, 그 효능과 위험도 모두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검증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간단하고 일리가 있는 대답이지만, 면역과 백신에 대한 수업을 들은 적도 없고 논문 한편 읽어본 적이 없는 내가 백신 과학을 믿는다고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각종 코로나19 백신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근거 없는 맹신은 아닐까.

다음 대답은 전문가들을 믿기 때문에 백신을 맞는다는 것이다. 똑똑하고 성실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또는 말 잘하고 유명한 전문가가 자기 이름을 걸고 백신의 효능과 안전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믿고 기꺼이 백신 접종에 참여한다는 생각이다. 백신에 대한 논문과 보고서를 직접 읽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대체로 자신을 대신해서 판단해주는 전문가에게 기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신을 전문가라고 부르며 미디어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서로 엇갈린 얘기를 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백신을 맞지 말라고 하는 ‘전문가’도 있다던데, 도대체 어느 전문가를 믿고서 백신 접종을 결정해야 할까.

논문에 나와 있기 때문에, 유명 대학교수가 말했기 때문에 믿는 것 대신 백신을 도입하고 승인하는 공적 과정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는 방법도 있다. 어떤 전문가들이 어떤 절차를 통해 모여서 토론하고 결론에 이르렀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과학잡지 <에피> 가을호에 실리는 대담에서 바이러스면역학자인 가톨릭대 남재환 교수는 코로나19 백신 도입 자문위원회의 경험을 전해주었다. 남 교수는 그 위원회에 백신과 관련해서 서로 인정하는 전문가들이 모였고, 그들이 비용 문제나 정부 입장에 구애받지 않고 각자의 의견을 소신껏 말할 수 있었으며, 그런 의견이 정부에 제대로 전달되었다고 말한다. 모든 자문회의가 이렇게 작동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백신 문제에서 한국의 전문가들은 의견을 모아낼 수 있었고 정부는 전문가의 말을 경청했다.

남 교수는 백신 도입 논의 과정을 돌아보며 “그때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이 회의는 꼭 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고 말한다. 방역과 치료와 연구 현장에서 바쁘게 일하던 전문가들이 위원회의 부름에 응답하여 저녁이든 주말이든 가리지 않고 한자리에 모였고, 거기에서 지식과 경험을 가감 없이 공유했고, 이견이 있다면 토론하고 조정할 수 있었고, 정부가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최선의 제언을 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해서 나온 결정과 권고는 조금 더 믿을 만하게 된다. 이렇게 위기 상황에서 전문가의 지식과 의견을 한자리에 모으는 공적 절차를 이해하고 검증함으로써 우리는 그 결론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우리가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바이러스와 백신에 대한 새로운 과학 지식만이 아니다. 우리는 과학, 전문가, 정부에 대한 새로운 신뢰를 쌓아 올려야 하고 그 신뢰를 뒷받침할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그 근거 중 하나는 과학이 사회적으로 논의되고 승인되고 적용되는 꼼꼼한 과정에 있다. 세부 전공, 소속 기관, 이념, 종교, 그 밖의 여러 이해관계가 다른 전문가들이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의사결정에 이르는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회제도로서 존재하는 과학을 발견한다. 과학의 가치는 전문가들이 공적으로 토론하고 합의하는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구현되고, 이를 통해 과학도 더 단단해진다.

백신을 믿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믿는 것일까? 백신은 과학적 연구를 통해 도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제도를 통해 승인되었다. 백신을 믿는 것은 곧 사회를 믿는 것, 즉 우리가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합의를 이루어내면서 같이 살아갈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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