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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양희은의 어떤 날] 발로 만들어도 최고의 맛

등록 2021-08-29 21:54수정 2021-09-29 14:19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십수년 전에 시골 마을마다 찾아가 할머니들께 반찬 만들기를 배우던, <잘 먹고 잘 사는 법>(SBS)의 ‘시골밥상’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냥 우리네 외갓집에 가듯 찾아가서 어르신들이 말로 이리저리 가르쳐주시면 우리는 입말 음식을 손, 발, 몸을 움직여 마당 남새밭에서 딸 것 따고 캘 것 캐서 시키는 대로 만들었다. 비교적 메모에 강한 편인 나는 작은 노트에 꼬박꼬박 적고, 집에 오면 재료를 사서 꼭 복습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할머니 댁에서 해 먹은 그 맛이 안 났다. 한 1년 가까이 복습하다가 맛 내기가 힘들어지니까, 심드렁하니 내 손맛에 짜증도 났고 복습하기를 포기했다. 다시금 재료와 순서를 되짚어도 그 맛이 안 났다. 농협에서 같은 재료를 사서 만들었는데 왜, 왜, 그 맛을 못 내는데? 하다가 답을 찾았다. 그건 다름 아닌 재료의 이동 거리의 문제였다. 요리 다큐를 보면 유명 셰프들마다 텃밭을 가꾸며 방금 딴 채소로 조리했다. 첫째도 신선한 재료, 둘째도 셋째도 신선한 제철 재료가 비결이었다. 제로마일리지 운동도 있지만 산지에서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거리가 문제였다.

로컬푸드 운동이랄까? 자기 사는 곳 가까이에서 먹을거리를 선택하는 게 건강과 환경을 생각할 때 좋은 일이다. 더 나아가 자기 먹을거리를 제 손으로 마련하는 게 최고의 답이었다. 할머니 댁 마당에서 이런저런 나물거리를 끊고 다듬고 데치거나 볶거나 무치는데, 우리 간장·된장·고추장·막장·집장 등으로 간을 하고, 자식들 먹이려고 약 안 치고 가꾸었다는 들기름·참기름·‘깨부숭이’로 마지막 점을 찍으면, 과장해서 말하면 뭐 발가락으로 만들어도 최고의 맛이었다. 중국 무술영화에서 보면 장풍이 나온다는 손바닥 중앙의 기운도 중요하지만(이를테면 손맛), 마당에서 금세 가져온 채소들로 만들면 그냥 다 달고 맛났다. 마트에서 산 재료들과 내 집 텃밭에서 거둔 것을 어찌 비교하느냐 말이다. 대신 값을 치러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자식처럼 보살피고 가꿔야 한다. 친구들도 나이 쉰을 넘기고 아이들이 슬하를 떠나면 화분을 들이고 정성껏 가꾸기 시작한다. 자기 손길과 보호가 필요한 어린 생명을 돌보고 꽃피고 열매 맺는 기쁨을 알게 되면, 다들 손바닥 텃밭 전도사가 된다. 코로나19로 답답하게 지내는 동안 카톡에는 꽃과 열매 사진이 안부를 대신한다. 사진을 보며 이런저런 칭찬과 격려를 서로에게 해준다.

어느 날 수영장에서 독일서 귀국한 전직 간호사분이 몇살이냐고 묻길래 일흔이랬더니 “아이고 꽃중년이네~” 하셔서 웃었다. 일흔에 꽃중년?! 자기는 40년생인데 지금까지 운전도 하고 누구의 도움 없이 커튼도 혼자서 뜯어 빨고 걸고 다 해낸다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싸움패로 유명해서 예의 없는 꼴은 못 보니까 누구라도 거침없이 불러 따지며 싸웠는데, 이제는 그다지 싸우고픈 마음도 없고 나이 드니까 참 좋다고 했다.

“애들 교육도 이미 졸업했지, 부자는 아니지만 살 만하지. 그리고 뭐가 더 필요해? 명품이고 뭐고 다 거추장스럽고 무거울 뿐, 돈 쓸 일이 뭐가 있어? 마트 가서 반찬거리나 사지. 돈 별로 많이 들지 않아. 운전해서 슬슬 다니며 이렇게 수영하러 나오는 것만으로도 큰 복이다 느껴.” 곁에서 얘길 듣던 같은 연배의 분이 다리가 많이 아프니까 물에서 하는 운동이 최고라며, 자기는 뜰 가꾸는 게 좋고 철철이 온갖 꽃이며 채소(나물거리, 김칫거리)가 집 안 뜰에서 다 해결된다 하니, 독일서 오신 그분은 “어이구 질뚝거리는 사람들 보면, 죄 땅 부자야. 땅이 넓으니 놀릴 수나 있어? 뭐라도 심어 가꿔야 할 테니 허리, 무릎, 다리 아프고 고달프지.” 뜰 가꾸는 분 또한 만만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아파도 좋단다, 자신의 힐링이란다. 자기 밭에서 나는 푸성귀로 반찬을 만들고 자식들과 이웃에게 나누는 기쁨은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했다. 나보다 12살 위의 두 어른을 뵈며 채마밭에도 치를 값이 있구나, 아픈 몸이 가르쳐주네 싶었다. 베란다 농사를 짓는 친구들이 오종종하니 채소상자 몇개 마련해도 여름내 쌈채소 걱정 없고 겉절이도 하며, 어떤 땐 넘쳐서 이웃과 나누는 기쁨도 크다 했다.

가끔 방송사로 애청자들이 무언가를 보내주시는데 나보다 앞선 진행자분께 오던 선물과는 영 다르다며 스태프들이 웃는다. 내가 <엠비시>(MBC) ‘여성시대’를 맡은 지는 23년째인데 오이, 토마토, 감자, 고구마, 옥수수, 찐빵, 김밥, 떡, 생선 등등을 받았다. 농산물과 자기가 직접 만든 반찬, 바다에서 잡은 생선 등은 자식과도 같은 거라서 우리 팀과 나누고 남은 것은 꼭 가져와서 반찬으로 해먹는다. 이동 거리는 길지만 그 정성 어린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도 우리 집 손바닥 정원을 뒤집고 내년 봄에는 도시농부의 꿈을 실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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